가을문단에 "소설 풍년"이 들었다.

40~50대의 중견작가부터 20~30대의 신세대작가들까지 왕성한 결실들을
쏟아내고 있다.

박정규씨의 창작집 "로암미의 겨울" (훈민정음 간)과 이상문씨의
"OH, NO!" (책만드는집 간), 장정일씨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백민석씨의 "내가 사랑한 캔디" (이상 김영사 간), 박종길씨의
"호모사피엔스의 추억" (가리온 간) 등이 잇따라 출간된 것.

이들 작품은 세기말의 그늘진 구석을 비추면서 저마다 "출구없는
시대"의 희망찾기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신.구세대의 세상읽기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50고개에 올라선 작가들이 사회적 규범과 도덕성에 기준을 두고 있는
반면 30대 전후의 신세대작가들은 기존가치체계의 파괴를 통해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

이른바 세기말의 성과 사랑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박정규씨의 소설집 "로암미의 겨울"은 손상된 세계의 복원과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치유를 담고 있다.

로암미는 히브리어로 "버린 자식"이라는 뜻.

등장인물은 제도와 폭력에 고통받는 비관주의자들이 대부분이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들이 외부의 폭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할
힘이 없다는 점.이 무력함이 스스로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과정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이상문씨의 "OH, NO!"는 세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

집안의 몰락으로 실의에 빠진 재벌 외아들 조관우와 몰락을 조종한
여인이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그의 이복동생이자 정실자식인
백나한 등 세 남자가 오현진이라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시소게임이 줄거리.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30대후반의 조각가와 열여덟살짜리
여고생을 통해 우리사회의 허상을 꼬집은 작품.

온갖 성묘사가 거침없이 동원된 이 소설은 "신버지" (신격화된 아버지의
준말)로 상징되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맞서는 신세대의 항변을 담고 있다.

흔한 포르노그래피같지만 이를 극단적인 자기모멸 과정으로 치환시킨
서술법이 장정일소설의 또다른 전형을 엿보게 한다.

장정일 소설이 개인적 비극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백민석씨의
"내가 사랑한 캔디"는 사회적인 대응력에 무게중심을 둔 작품.

전교조와 최루탄, 서투른 동성애와 발기부전등 "90년대 낙오자"들의
좌절을 모자이크했다.

기성사회의 억압적 요소에 대항하는 이들의 몸짓은 소설의 시간이
"오전 열한시"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으로 상징된다.

박종길씨의 "호모 사피엔스의 추억"은 이질적인 성격의 두 남자와
모성이 강한 한 여자의 사랑.

같은 마을에서 자란 이들은 부모세대가 빚은 갈등의 부산물로
괴로워한다.

작가는 이들의 어린시절과 30대 중반이 될때까지의 삶을 통해 개인과
사회, 과거와 현재의 틈새를 조명한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