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어반복'' 정책 ]

삼성전자 수원공장에서 생산된 냉장고를 부산 광복동 대리점까지
운반하려면 트럭대여료(8톤 기준)만 22만원이 든다.

인건비까지 합하면 냉장고 운송비용은 대당 평균 1만7천원.

반면 부산항에서 미국 LA까지 냉장고를 운반하는 비용은 대당 3만5천원
정도다.

부산항에서 LA까지 뱃길(8천4백km)과 수원 부산간 거리(4백40km)를
감안하면 수원 부산간 운반비가 꼭 10배다.

냉장고 같은 고가제품은 그래도 낫다.

"원가가 개당 500원인 음료수의 경우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데 드는 비용이
제조원가와 맞먹기도 한다"(김정환 한국물류협회 전무).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다.

지난해 국내 기업들은 71조원을 물류비로 썼다.

제조업과 도소매업 전체 매출액(4백90조원)의 14.3%를 "길바닥에 뿌린"
것이다.

수출기업일 경우 이 비중이 16.9%까지로 올라간다.

미국(7.7%)과 일본(8.8%)의 2배 수준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가파른 상승 속도.

87년(8조원)과 비교해 8년만에 9배가 늘어났다.

기업들은 매년 30%이상씩 물류비를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구로공단에서 인쇄물을 생산하는 S사는 지난 3월 미국 유명백화점이
발주한 카타로그 제작을 수주받으려다 포기하고 말았다.

인쇄물 샘플의 질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S사가 수출을 포기한 것은 채산성때문.

"가까운 인천항은 적체가 심해 부산항이나 울산항으로 컨테이너를
수송해야 한다.

컨테이너 비용에 배삯까지 따져보니 수출가격을 맞추기 힘들었다"(S사
수출담당이사)는 이유에서다.

특정 기업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좁은 도로와 부족한 사회간접자본시설로 고통을 겪고
있다.

특히 문제는 육상 운송.

자동차 1대당 도로연장은 91년 13.67km에서 94년 9.97km로 크게 줄었다.

차량대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반면 도로확충은 이에 못미쳤기 때문이다.

철도의 경우도 이미 한계상황을 넘어섰다.

지난 89년 경부선을 시작으로 중앙선 영동선은 92년, 전라선은 94년부터
포화상태에 빠졌다.

항만시설도 마찬가지다.

88년 80%수준을 보이던 항만시설확보율은 지난해 68%로 떨어졌다.

그 결과 인천항에선 만 하루(21시간)를 꼬박 기다려야 배를 댈 수 있다.

이로인한 국민경제적 손실은 엄청나다.

"지난해 사회간접자본 부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16조원에 달했다.

오는 2001년까지는 이로 인한 누적손실만 2백66조원에 이를 것"(교통개발
연구원. 95년)이라는 조사가 이를 입증한다.

물론 물류비 부담이 늘어난 데는 개별기업의 책임도 있다.

주먹구구식의 물류처리나 자사이기주의로 인한 중복투자 등이 단적인
예다.

네트워크 개념이 없는 비효율적 점근방식도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인들은 부차적이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SOC투자가 부족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소프트웨어를 아무리 정교하게 다듬어도 하드웨어가 갖춰져 있지 않다면
무용지물인 탓이다.

8비트 용량의 컴퓨터에 32비트급 소프트웨어를 실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업 물류비중 운송비 비중이 절반 이상(65%)을 차지한다는 사실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정부도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보유하고 있는 공기업지분을 매각하고 민간자본을 동원해 SOC투자
재원을 마련하겠다"(건설교통부)는 복안이다.

정부의 한계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국내 증권시장을 생각하니 공기업지분을 매각하는게 쉽지 않고 민간자본을
끌어들이겠다는 원칙은 세웠지만 생각만큼 참여가 활성화되지 않고 있어서다.

결국 해결책은 있지만 실천은 없는, 그래서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그자리에서만 맴돌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나 할까.

여기서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부보유지분을 파는게 여의치 않다면 대신 장기교환국채를 발행하는 것도
검토해 볼 수 있다.

또 굳이 국내증시에서만 보유지분 매각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SOC투자에 민간자본을 참여시키고 싶다면 걸맞는 투자유인책을 제시하는
게 순서다.

어차피 정책이란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간과되지 말아야 할 것은 SOC부문이 자꾸만 투자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현실인 것이다.

세계은행은 최근 한국의 지속적인 경제 성장엔 "지속적인 SOC투자가
핵심"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2005년까지는 무려 2백20조원을 이 부문에 투자해야 한다는 결론도
덧붙여졌다.

이는 결국 SOC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때 나타나는 "파괴적"
결과에 대한 경고에 다름아니다.

< 정리 = 이의철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