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선원 원장 대행스님(70).

소설 도와 무의 주인공이다.

1926년 1월 2일 무관이던 집안에서 3남2녀의 장녀(속명 노점순)로 태어나
9살의 어린 나이에 ''왜 사람에 따라 잘 살고 못사는 차별이 있는가''라는
의정을 낸후 성년이 되면서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50년 한 스님으로부터 불법의 진수를 전해들은후 죽음을 각오한 대정진
끝에 진여의 세계를 중득했다.

10여년동안 묵묵히 행정진하던 스님은 한동안 오대산 상원사 밑의 작은
토굴인 견성암에 계셨다.

그후 신도들의 간청으로 72년 5월 지금의 안양 한마음선원을 세웠다.

이후 금왕지원을 비곳 제주 부산 등 전국 12개지원을 개설했으며
캘리포니아 모건힐을 비롯 알래스카 뉴욕 오하이오 시카고와 함께 6일에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8번째의 해외지원도 개설한다.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포교망을 일궈내면서 최근엔 대규모 대중집회를
열고 계시다.

지난 9월15일엔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2만여명이 운집한 큰법회를 통해
"인생은 고가 아니다"라고 강조하셨다.

뒤셀도르프지원 개설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려는 스님을 잠깐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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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선 인생을 고통의 바다(고해)에 비유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스님께선 "삶은 고가 아니다"라고 역설하고 계십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 대행스님 =고는 공과 함께 불교의 핵심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음에 계합하지 않는 대상을 만났을때 삶은 고임이 분명합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삶이 고가 아닐 수 없지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싫어하는 사람과의 만남 이 모든 것들이 확실히
고입니다.

그러나 한생각 돌리면 삶은 고가 아닙니다.

좋으면 좋은데로 싫으면 실은데로 그냥 놓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보라 이겁니다.

이것이 곧 관입니다.

그러면 고라고 이름 붙일게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게 마음입니다.

오늘 궂은 일이 며칠 지내다보면 궂은 일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데 순간 순간 그사실을 놓치고 제스스로 창살없는 감옥을 만들어
고에 빠져들어요.

넘어져보지 않은 사람은 일어설줄도 몰라요.

크게 넘어지세요.

그리고 크게 일어서세요.

삶이 고가 아닌 도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현재의 고는 전생의 업보로 나온 결과이므로 피할 수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 대행스님 =업보를 업보라고 고정되게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업보입니다.

모름지기 참된 불자라면 고의 실체를 분명히 보고 그것을 뛰어 넘을줄
알아야 합니다.

짊어지고 나온 고통의 인과를 영영 지울 수 없다면 그야말로 비애 그자체일
것입니다.

그러나 업이 한치의 오차도 한치의 에누리도 없다 할지라도 한생각 돌리면
억겁의 업도 녹여버릴 수 있습니다.

이미 녹음된 테이프에 다른 녹음을 할때 번거롭게 따로 지우지 않더라도
그위에 새로운 것을 입력시키면 고스란히 새로운 것이 입력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삶은 고가 아니라는 믿음에서 삶은 혁명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도 닦으려는자 편안하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삶 그 고통스런 순간순간을 스승으로 삼으세요.

내게 다가온 이 고야말로 나를 성숙시키는 한 물건이라고 한생각 돌리세요.

-스님께선 유년기와 청년시절 물 한모금 열매 한알로 연명하며 이름모를
산속을 헤매는 등 엄청난 고행을 하셨는데 어린나이,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습니까.

<> 대행스님 =그것을 고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가 오히려 지금보다 더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가진게 없어 잃어버릴 걱정도 없고 주위에 사람이 없어 걸리는게
없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그보다 못한 편입니다.

-불교에선 수행의 방법으로 고행을 하지말고 중도행을 하라고 하지만
스님도 그러하셨듯 수많은 성현들이 견성을 해가는 과정에서 각고의 고행이
있었습니다.

고행은 필수적인 가요.

<> 대행스님 =고행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몸뚱이로 하지 말고 정신으로 고행을 해야합니다.

이 경우엔 고행이라기 보다 차라리 자기를 죽이는 일입니다.

내 한 생명을 던진다는 철저한 정신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나를 형성시킨 것이 어떤 것인지를 골똘히 참구해나가는 진지한 노력없이는
자신의 주인공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인공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며 어떤 보람이 있을 까요.

<> 대행스님 =남의 말에 따라 사는 노예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대자유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갈등에 사로 잡히지 않고 생각하는바 행동하는 바가 모두
여법한 것이 되어 걸림이 없고 힘이 넘치며 병고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요.

자동차와 운전사의 관계로 비유해보면 쉬울 것입니다.

운전수가 핸들을 잡지 않고 놔두면 자동차가 마음대로 굴러가게 되어
사고가 나기 마련인데 운전수와 자동차가 하나가 되면 제대로 방향을 잡아
달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인공을 만난다는 것은 마음을 찾는 것이며 자동차가 운전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육신에, 운전수를 마음에 비유한다고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 대행스님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육신이 따로 있고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정신세계에만 몰두하고 중생들은 물질세계에만
탐닉하는데 어느 한쪽이 기울여져서도 안되고 오직 한 뿌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와 남, 육신과 정신, 겉과 속, 선과 악이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만
어찌해야 그것들이 한 뿌리임을 알 수 있을까요.

<> 대행스님 =마음안에서 길을 찾아야합니다.

고로 밖에서 찾지 말고 안으로 마음을 찾아야 합니다.

물질과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물질세계는 마음의 나름일 뿐입니다.

우주 삼천대천 세계의 근본은 바로 내마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세상 일체의 만물은 모두 다 이심전심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
한마음을 밝히면 그 뿌리가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일체선사의 말에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바로 죽여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누구를 스승으로 의지해야된다는 말이며 주인공과 부처는 어떤 관계일까요.

<> 대행스님 =어떤 경계에도 매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부처가 어디 높다른데 따로 있는줄 알면 잘못입니다.

일체중생에 불성이 있다고 했으니 한 사람 한사람이 모두 부처인데 누군
부처고 누군 부처가 아니라고 해야겠습니까.

다만 깨우치고 못깨우치고의 차이일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평생을 설하시고도 한마디도 한적이 없노라고
하셨습니다.

중생들이 자신속에 부처를 외면하고 밖으로 찾아헤멜까봐 그러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따르지 말고 너자신에 의지하고 너자신을 등불로 삼으라"고
신신 당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건만 후세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기지 않아 불상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상에 예배하기 보다 자기 속의 부처님에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마음의 주인공이란 바로 자기의 근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한마음의 주인공에게 맡기고 가면 모든 어려움이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그냥 믿고 밀고 나가세요.

이말을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엔 맡기고 나면 맡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한마음이라는 것을 간단히 말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 대행스님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의 평등공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평등하다고 하지만 태어날부터 빈부의 격차 머리가
좋은 사람 나쁜사람 등으로 차별되어지게 마련이어서 이를 한탄하거나
자랑하는 수가 있지 않습니까.

<> 대행스님 =영화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보십시요.

어떤 추잡한 역을 맡드라도 정성을 기울여 열심히 하지않습니까.

그 이유는 그것은 단지 배역일뿐 촬영이 끝나면 그 역할도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맡은 역을 지극 정성으로 소화해내지 않는다면 다음에 그 배우에게 중요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듯이 인생의 배역도 진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역이 임금역이든 거지역이든 거부하거나 겁내지 말고 열심히 소화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세생생 거지 역할로 살라는게 아니라 잠깐 그 역할을 하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역할도 따지고 보면 강제로 맡겨진게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 자동적으로 주어진 것이지요.

무대에 선 배우가 제 소임을 다하지 않고 불평만 하다가 내려온다면 다음
배역이 더 보잘것 없어지듯 우리의 인생도 그러합니다.

-스님께선 병고에 빠진 환자나 삶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신 사례가 있다는데 그 원리가 무엇입니까.

<> 대행스님 =내가 고쳐준 것이 아닙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며 건강함과 병드는 것이 둘이 아니라 모두 하나임을
스스로 깨닫는 순간 병은 저절로 낫게 마련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발전소의 스위치를 올리지 못해 괴로워 할 때 환자와
내가 전기가 통해 그 발전소를 돌린 셈이지요.

우주의 내가 둘이 아니며 남과 내가 서로 한마음임을 알면 힘이 생기고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됩니다.

발전소를 우주의 근본이라고 한다면 내집의 전기는 나의 근본입니다.

발전소의 전기와 내집에 들어오는 전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같은
전기이지 않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자기발전기를 갖고 있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 스위치를 찾지 못하고 보단(버턴)을 누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화에 비유해도 됩니다.

모든 전화는 전화국을 통해서 다 연결됩니다.

이와같이 각자의 마음 근본은 우주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근본에서 일체 만법이 다 들고 나며 내마음의 근본은
시간 공간에 구애됨이 없이 여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 대담 = 김대곤 편집기획위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