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설명회에 다녀와서..] '내가 본 나진/선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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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국 < 한국미쓰이물산 대표 >
내가 여동생과 헤어진 것은 19세때(여동생은 10세)였다.
이제 내 나이 70을 바라보니(여동생은 환갑) 정확히 50년 만의 만남인
셈이다.
누이동생을 만나기까지는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대외경제협력위원회측이 만남을 주선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 온
정치보위부 소속 요원들은 별도로 심사받을 것을 요구했다.
대외경제협력위 간부들도 이 점에 관한한 한마디도 못했다.
평양에서 온 실무요원들에게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심사요원들은 까다롭게 굴었다.
몇차례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만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내가 받은 느낌은 북한사회가 일관된 시스템 없이 각각 따로
노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한쪽에선 나진.선봉 투자설명회를 준비하고 또 다른 쪽에선 무장간첩을
내려보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닌가 싶다.
누이동생은 선봉시에서 내륙으로 70리 정도 떨어진 조그만 시골촌에서
살고 있었다.
인근엔 그 유명한 아오지 탄광이 있는 곳이다.
막상 여동생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차분해졌다.
담담한 기분이었다.
세월은 그저 세월대로 흘렀을 뿐이고 그것을 추스리는 책임은 언제나
살아가는 사람 몫이다.
반가웠다.
그러나 눈물은 나지 않았다.
여동생은 남편과 함께 아들 딸 낳고 다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릴적엔 수줍음 많은 소녀였는데 이젠 손자까지 본 할머니였다.
표정은 밝고 쾌활해 보였다.
아들(나에겐 조카)도 최근 결혼했다고 한다.
누이동생은 "조국의 보살핌 덕분에 입고 먹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족은 어떻고 사는 곳은 어디라는 둥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기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똑같은 말을 썼지만 때로는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때도 있었다.
서로의 간격을 뛰어넘기에는 50년이란 세월이 너무 길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이동생과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이번 투자설명회 기간중 많은 이들이 도요
엔지니어링과 북한측의 관계에 대해 궁금증을 표했다.
아마도 도요엔지니어링측이 나진.선봉 투자개발기본계획안을 작성한 것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게다가 국내 일부 언론에선 일본 기업들이 나진.선봉 특구 개발을 주도할
것이라고 보도를 해 이같은 오해를 증폭시켰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자본만으로 나진.선봉을 개발할 수는 없다.
일본측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북한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도요엔지니어링이 나진.선봉지구 개발방식에 대해 안을 내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일본기업에 의해 나진 선봉이 개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간단하게나마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내가 북한측과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지난 94년 11월경이었다.
나는 일본 싱와물산 고문자격으로 북한측 인사들과 만났다.
이자리엔 또 싱와물산과 도요엔지니어링 관계자도 참석했다.
당시 김정우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김문성(대외경제연구원 소속 간부)이 참석했다.
이 모임은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북경의 차이나 월드 호텔에서 북한측은 "나진 선봉에 대해 투자를 해주지
않겠느냐"고 요청했다.
그러나 미쓰이는 나진.선봉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북한이 지금과 같은 관점으로 경제개발을 접근해서는 결과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직접투자 대신 나는 "북한측이 전체적인 경제개발 마스터 플랜을 짜는
작업은 도와줄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베트남과 일본의 관계가 정상화 된 이후 베트남 경제개발 계획을
미쓰이측에서 입안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측은 직접적인 투자 이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북한측 관계자는 "북조선 경제가 그정도까지 진전되지는 못하고 있다.
남북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달라져야 마스터 플랜을 짤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요지의 얘기를 했다.
북한측은 "그렇다면 대신 나진 선봉지역지역에 대한 마스터 플랜이라도
짜 달라"고 제의했다.
여기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좋다"고 승낙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1차 실사팀이 파견된 때가 95년 5월.
도요엔지니어링과 미쯔이물산 관계자, 컨설팅회사인 유니코 등에서 5명의
실사팀이 파견됐다.
이들은 비행기편으로 연포 성덕 비행장에 도착했다.
실사팀이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인 9월 나는 개인적으로 김정우와
북경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는 2차 조사단도 북경을 경유해 평양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이때 나온 얘기가 나진 선봉을 중화학 공업단지로 육성하는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초 북한은 나진 선봉을 관광지구나 경공업단지로 육성할 걔획이었다.
그러나 실사단의 의견은 유동인구가 부족(나진 선봉지역은 12만정도)하고
관광자원을 활용하는 데도 문제가 있어 나진.선봉이 경공업단지나
관광단지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최소한 유동인구가 1백만명은 돼야 경공업단지로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대신 바다에 맞닿아 있는 천혜의 항구가 있고 두만강 물(공업용수)을
쓸 수 있는데다 배를 쉽게 댈 수 있는 해안마저 갖추고 있어 중화학공단으로
안성마춤이라는 것이었다.
나진 선봉과 지형적으로 비슷한 곳이 일본의 가시마 공단이고 이곳을
개발한 곳도 도요엔지니어링이라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사실 나진.선봉지역 같은 입지적 조건은 동북아경제권 어디서도 찾아
보기 힘든 곳이다.
입지 조건만 보면 연간 4백억달러에서 5백억달러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지역이다.
이같은 설명을 듣더니 김정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공개적으로 관광단지나 경공업단지로 개발한다고 공표해 놓았는데
지금에 와서 이를 바꾼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가지로 어려운 점이 있지만 연구는 계속 해 달라"고
요청했다.
"시기를 기다려보자"는 말도 했다.
결국 이후의 스터디는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음에 김정우와 만난게 올 7월이었다.
그가 일본에 왔을 때였다.
김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우리도 스터디 해 봤는데 역시 중화학 공업쪽이
제일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이제는 좀 공격적으로 스터디를 해주시오"
라고 요청했다.
그때 내가 부탁받은 것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모든 자료를 제공할 테니 나진.선봉을 중화학공단으로 육성하는
문제에 대해 보다 심층적으로 조사해달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투자포럼에
사용할 팜플렛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모두 받아들였고 이 팜플렛이 이번 설명회때 사용되었다.
상황은 이렇게 진행된 것이었다.
나는 지금 나진.선봉을 개발하는 문제와 관련해 국내 몇몇 그룹과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어디라고 밝힐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재차 강조한다면 나진.선봉 투자건은 분명 남북 경협의 새로운 지평을
열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다만 지금의 여건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바로 그런데 있지 않나 싶다.
서로 머쓱한 남.북간의 심부름 역할 말이다.
그래서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앞당기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나는 만족한다.
[[ 눈에 뜨인 입지 ''우암지구'' ]]
나진.선봉지역 내에는 승리화학공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인접한
청진시에는 제철을 기본으로 하는 각종 중공업 설비가 있다.
어느 것이나 낡았으며 현대의 중공업 기술에서 요구되는 설비수준보다
낮다.
현재의 나진.선봉지역만으로만 보면 중공업개발계획은 없다.
그 원인으로는 자금부족과 사회간접자본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지역의 장래성은 상당하다.
광대하고 평탄한 토지가 있는데다 임해지역이라는 특성때문이다.
특히 우암지구의 비교우위적인 입지가 돋보인다.
내륙으로 들어온 해안선은 천혜의 항구입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개발 사례로는 60년대 일본에서 시작된 가시마 임해공업
지대를 들 수 있다.
가시마공단 역시 나진.선봉과 같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5일자).
내가 여동생과 헤어진 것은 19세때(여동생은 10세)였다.
이제 내 나이 70을 바라보니(여동생은 환갑) 정확히 50년 만의 만남인
셈이다.
누이동생을 만나기까지는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대외경제협력위원회측이 만남을 주선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 온
정치보위부 소속 요원들은 별도로 심사받을 것을 요구했다.
대외경제협력위 간부들도 이 점에 관한한 한마디도 못했다.
평양에서 온 실무요원들에게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심사요원들은 까다롭게 굴었다.
몇차례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만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내가 받은 느낌은 북한사회가 일관된 시스템 없이 각각 따로
노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한쪽에선 나진.선봉 투자설명회를 준비하고 또 다른 쪽에선 무장간첩을
내려보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닌가 싶다.
누이동생은 선봉시에서 내륙으로 70리 정도 떨어진 조그만 시골촌에서
살고 있었다.
인근엔 그 유명한 아오지 탄광이 있는 곳이다.
막상 여동생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차분해졌다.
담담한 기분이었다.
세월은 그저 세월대로 흘렀을 뿐이고 그것을 추스리는 책임은 언제나
살아가는 사람 몫이다.
반가웠다.
그러나 눈물은 나지 않았다.
여동생은 남편과 함께 아들 딸 낳고 다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릴적엔 수줍음 많은 소녀였는데 이젠 손자까지 본 할머니였다.
표정은 밝고 쾌활해 보였다.
아들(나에겐 조카)도 최근 결혼했다고 한다.
누이동생은 "조국의 보살핌 덕분에 입고 먹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족은 어떻고 사는 곳은 어디라는 둥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기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똑같은 말을 썼지만 때로는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때도 있었다.
서로의 간격을 뛰어넘기에는 50년이란 세월이 너무 길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이동생과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이번 투자설명회 기간중 많은 이들이 도요
엔지니어링과 북한측의 관계에 대해 궁금증을 표했다.
아마도 도요엔지니어링측이 나진.선봉 투자개발기본계획안을 작성한 것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게다가 국내 일부 언론에선 일본 기업들이 나진.선봉 특구 개발을 주도할
것이라고 보도를 해 이같은 오해를 증폭시켰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자본만으로 나진.선봉을 개발할 수는 없다.
일본측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북한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도요엔지니어링이 나진.선봉지구 개발방식에 대해 안을 내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일본기업에 의해 나진 선봉이 개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간단하게나마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내가 북한측과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지난 94년 11월경이었다.
나는 일본 싱와물산 고문자격으로 북한측 인사들과 만났다.
이자리엔 또 싱와물산과 도요엔지니어링 관계자도 참석했다.
당시 김정우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김문성(대외경제연구원 소속 간부)이 참석했다.
이 모임은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북경의 차이나 월드 호텔에서 북한측은 "나진 선봉에 대해 투자를 해주지
않겠느냐"고 요청했다.
그러나 미쓰이는 나진.선봉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북한이 지금과 같은 관점으로 경제개발을 접근해서는 결과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직접투자 대신 나는 "북한측이 전체적인 경제개발 마스터 플랜을 짜는
작업은 도와줄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베트남과 일본의 관계가 정상화 된 이후 베트남 경제개발 계획을
미쓰이측에서 입안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측은 직접적인 투자 이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북한측 관계자는 "북조선 경제가 그정도까지 진전되지는 못하고 있다.
남북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달라져야 마스터 플랜을 짤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요지의 얘기를 했다.
북한측은 "그렇다면 대신 나진 선봉지역지역에 대한 마스터 플랜이라도
짜 달라"고 제의했다.
여기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좋다"고 승낙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1차 실사팀이 파견된 때가 95년 5월.
도요엔지니어링과 미쯔이물산 관계자, 컨설팅회사인 유니코 등에서 5명의
실사팀이 파견됐다.
이들은 비행기편으로 연포 성덕 비행장에 도착했다.
실사팀이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인 9월 나는 개인적으로 김정우와
북경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는 2차 조사단도 북경을 경유해 평양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이때 나온 얘기가 나진 선봉을 중화학 공업단지로 육성하는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초 북한은 나진 선봉을 관광지구나 경공업단지로 육성할 걔획이었다.
그러나 실사단의 의견은 유동인구가 부족(나진 선봉지역은 12만정도)하고
관광자원을 활용하는 데도 문제가 있어 나진.선봉이 경공업단지나
관광단지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최소한 유동인구가 1백만명은 돼야 경공업단지로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대신 바다에 맞닿아 있는 천혜의 항구가 있고 두만강 물(공업용수)을
쓸 수 있는데다 배를 쉽게 댈 수 있는 해안마저 갖추고 있어 중화학공단으로
안성마춤이라는 것이었다.
나진 선봉과 지형적으로 비슷한 곳이 일본의 가시마 공단이고 이곳을
개발한 곳도 도요엔지니어링이라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사실 나진.선봉지역 같은 입지적 조건은 동북아경제권 어디서도 찾아
보기 힘든 곳이다.
입지 조건만 보면 연간 4백억달러에서 5백억달러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지역이다.
이같은 설명을 듣더니 김정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공개적으로 관광단지나 경공업단지로 개발한다고 공표해 놓았는데
지금에 와서 이를 바꾼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가지로 어려운 점이 있지만 연구는 계속 해 달라"고
요청했다.
"시기를 기다려보자"는 말도 했다.
결국 이후의 스터디는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음에 김정우와 만난게 올 7월이었다.
그가 일본에 왔을 때였다.
김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우리도 스터디 해 봤는데 역시 중화학 공업쪽이
제일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이제는 좀 공격적으로 스터디를 해주시오"
라고 요청했다.
그때 내가 부탁받은 것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모든 자료를 제공할 테니 나진.선봉을 중화학공단으로 육성하는
문제에 대해 보다 심층적으로 조사해달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투자포럼에
사용할 팜플렛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모두 받아들였고 이 팜플렛이 이번 설명회때 사용되었다.
상황은 이렇게 진행된 것이었다.
나는 지금 나진.선봉을 개발하는 문제와 관련해 국내 몇몇 그룹과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어디라고 밝힐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재차 강조한다면 나진.선봉 투자건은 분명 남북 경협의 새로운 지평을
열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다만 지금의 여건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바로 그런데 있지 않나 싶다.
서로 머쓱한 남.북간의 심부름 역할 말이다.
그래서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앞당기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나는 만족한다.
[[ 눈에 뜨인 입지 ''우암지구'' ]]
나진.선봉지역 내에는 승리화학공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인접한
청진시에는 제철을 기본으로 하는 각종 중공업 설비가 있다.
어느 것이나 낡았으며 현대의 중공업 기술에서 요구되는 설비수준보다
낮다.
현재의 나진.선봉지역만으로만 보면 중공업개발계획은 없다.
그 원인으로는 자금부족과 사회간접자본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지역의 장래성은 상당하다.
광대하고 평탄한 토지가 있는데다 임해지역이라는 특성때문이다.
특히 우암지구의 비교우위적인 입지가 돋보인다.
내륙으로 들어온 해안선은 천혜의 항구입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개발 사례로는 60년대 일본에서 시작된 가시마 임해공업
지대를 들 수 있다.
가시마공단 역시 나진.선봉과 같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