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해 천하통일을 하기 이전을 말한다.
서기로 치면 기원전 220년에서 기원전 4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대다.
춘추시대의 뒤를 이어 전개된 전국시대는 전운 속에서도 학문과 사상을
활짝 꽃피운 중국사상사의 황금시대였다.
위나라의 문후는 자하 단간목 이극 등 원로학자들을 맞아들여 학문을
일으킴으로써 명성을 드높였다.
제나라의 위왕은 그것을 본받아 수도에다 학문구역을 따로 만들어 학술
사상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른바 "제자백가"로 불리는 수많은 학파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반고가 "한서" 예문지에다 "범제자백팔십구가, 사천삼백이십사편"이라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학파의 학자들이 나름대로의 주장을
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야말로 "백가쟁명의 시대"였다.
그때 각 학파를 이끈 인물들은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저술로 남겨
놓았다.
병가의 손자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책의 본래 이름은 "손자"지만 그것이 병법서인 탓인지 요즘은
흔히 "손자병법" "손오병법"으로 불린다.
본명이 손무였던 손자는 춘추시대말의 전략가로서 전국시대초까지
살았다.
그는 기원전 6세기께 오나라 왕 합여 아래서 장수로 있으면서 주위의
여러나라를 굴복시키고 왕을 패자의 자리에 올려 놓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손자병법"은 전국시대 중기에 제나라 전략가로 유명했던
그의 후손 손 월빈 이 내용을 보완했다는 설도 있다.
이 책은 병법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치자의 경륜, 성공의 비결
등 인간승리의 원리도 담고 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금도 널리 읽히는 고전에 속한다.
나폴레옹과 독일의 빌헬름2세가 "손자병법"의 애독자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본래 "한서"예문지에는 "손자병법"이 82편이고 그림도 9권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위나라의 조조가 정수만 뽑아 정리했다는
13편 뿐이다.
그런데 최근 중국 섬서성 서안에서 "손자병법" 전편인 82편의 사본이
발견됐다고 한다.
죽간에 쓰여진 내용을 예서로 옮긴 것이란다.
권모술수에 능했던 정치가 조조가 빼어버린 것들 중에 혹시 요즘처럼
혼란스럽고 미래예측이 힘든 세기말의 인류에게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자못 궁금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