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국가는 애국가이고 국화는 무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우리사회의 관행때문에 그렇게 인식돼 있을뿐
법적인 근거는 없다.

국가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 노래인데 비해
애국가는 공식.비공식을 떠나 나라를 사랑하는 내용을 담은 노래라는
점에서 아주 다른 것이다.

애국가는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는데 그 중에서 국가로 지정된 애국가만이
나나를 상징하는 의식음악으로 구실하게 된다.

우리나라 애국가는 갑오경장이후 각지방에서 성창되기 시작해 1896년
무렵엔 10여 종류에 이르렀다.

나필균작 "애국가", 정경퇴 한명원 유태성 달성 예수교인들의 "애국가",
새문안교회 "애국가" 그리고 평양 김종섭 배재학당의 "애국가" 등이 있었다.

그러나 배재학당 학생들이 부른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을 따서 부른 "애국가"는 영국 국가의 가사와 곡을 가져다 쓴
것이었다.

현행 "애국가"의 가사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윤치호가 지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곡은 "올드 랭 사인"에 붙여 불렀으나 19 48년 정부수립 이후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로 시작되는 후렴은 1896년 11월21일
독립문 정초식때 배재학당 학생들이 부른 "애국가"로 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한반도에 무궁화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는 기록은 동진때
곽박이 편찬한 산해경부터 나온다.

조선조 세종때 강희안은 "양화소록"에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근역이라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이 역사적으로 무궁화는 우리 국화였으나 조선조말에 왕실화가
배꽃으로 정해지면서 무궁화는 한때 그 세력을 감퇴했었다.

그러나 윤치호 안창호등이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수단으로 "무궁화동산"을
절규하면서 국민이 다시 무궁화를 인식하고 사랑하게 됐다.

총무처는 애국가와 무궁화를 공식적으로 국가와 국화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애국가를 국가로 지정하는덴 우리사회 일각에서 반대론과 시기상조론이
없지 않은 모양이지만 애국가를 부르며 숨져간 우리 순국선열을 생각할 때
늦은 감머저 없지 않다.

국가란 단순한 예술 가곡이 아니라 민족정신이 깃들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