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인은 보옥의 시중을 추문에게 부탁해 놓고 왕부인에게로 갔다.

"무슨 일로 왔느냐?"

왕부인이 습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습인은 수심이 가득찬 얼굴로 왕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마자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다.

"아니, 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느냐?

어디서 억울한 일이라도 당하였느냐?"

왕부인이 습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편히 앉도록 하였다.

"마님, 보옥 도련님이 보채 아가씨와 대옥 아가씨 둘 중에서 누구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까?"

"그건 왜 묻느냐?

보옥이 어릴 적부터 대옥을 동생처럼 여겨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내온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니냐?

보채는 나이가 조금 많으니까 누나처럼 여겼을 거고"

"보옥 도련님과 대옥 아가씨는 그냥 가까운 사이 정도가 아니에요"

습인은 보옥이 대옥을 얼마나 사모해왔는가를 그 동안 목도한 사실들을
예로 들면서 설명해나갔다.

습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왕부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변하였다.

"보옥의 마음이 그렇게까지 대옥에게로 쏠려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구나.

하지만 보채와 혼사를 치러야 보옥의 목숨이 부지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 하니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

근데 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보옥이를 살리려고 하다가 자칫 하면
그 반대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구나.

이 일은 내가 시어머님을 만나 뵙고 의논하겠으니 너는 일체 입을
다물고 있도록 하여라.

보옥이는 어떤가?

자기 혼사에 대해 눈치를 챈 것 같더냐?"

"보옥 도련님은 주위에서 누가 뭐라 그래도 아직 말귀를 알아듣지도
못하고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도련님 마음 속에서 들리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대답을 하는 건지 혼자 중얼중얼거리고 있는 적이
많습니다.

대옥 아가씨가 아니라 보채 아가씨랑 혼인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옥 도련님이 만약 알게 되면 어떤 증세가 도질지 정말 걱정이 됩니다"

습인의 눈에는 또 눈물이 글썽거렸다.

왕부인은 보옥의 마음과 건강을 염려하는 충성스런 시녀 습인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습인이 물러나자 왕부인이 황급히 옷을 챙겨 입고 대부인의 거처로
건너갔다.

대부인의 방에서는 마침 대부인과 희봉이 보옥의 혼사에 대하여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고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