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제가 이번에 지방으로 부임해 가면 몇 해나 지난후에 집으로
돌아올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머님과 집안 식구들을 떼어놓고 가야 하는 제 마음 무겁기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나라의 부름이니 어찌 하겠습니까.

보옥의 일은 어머님께 전적으로 맡기겠으니 모든 것을 어머님 뜻대로
진척시키십시오.

그리하시면 저도 조금이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고 부임지로 내려갈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설씨댁은 집안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설반이 아직 옥에서
풀려나지 않고 있고, 우리 집안도 귀비 원춘의 장례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상례에 의하면 앞으로 아홉 달 동안은 혼사를 치를수가 없는
처지인데, 어떻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모든 것을 어머님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가정이 그렇게 보옥의 혼사에 관련된 모든 일을 어머니 대부인에게
맡기고 식구들의 전송을 받으며 부임지로 떠나갔다.

보옥은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는 아버지와 작별을 하는데도
먼 하늘만 쳐다보고 뭐라뭐라 혼자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보옥의 손을 잡고 남편을 전송하는 왕부인의 눈에서는 연방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부인, 보옥의 혼사는 어머님 시키시는 대로 하고. 나도 인편에 종종
편지를 보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가정도 목이 메이는지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대부인은 가정이 부임지로 떠나간 후 보옥의 혼사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보옥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설반이 옥에 갇혀 있는 설씨댁 형편이나
상례같은 것에 구애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을 초대하여 정식으로 혼인식은 올리지 못하더라도 대강 격식을
갖추어 신랑과 신부가 신방에 들도록 하면 될 것이었다.

성대한 혼인식은 나중에 보옥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두 집안 형편이
좋아졌을때, 가정도 부임지에서 올라오고 하여 수많은 하객들의 축복속에
다시 치르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습인은 한편으로 크게 걱정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보옥의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금의 인연을 가진 보채와 혼인을 서두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대옥을 보채보다 훨씬 좋아하는 보옥이 보채와
혼인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 병세가 갑자기 더욱 악화될지도 몰랐다.

그러면 혹을 떼려다가 오히려 혹을 붙이는 꼴이 되지 않는가.

말하자면 보옥의 목숨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목숨을 빨리 잃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 것인가.

그리고 대옥의 형편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