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

69년 여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얻고 나는 공군사관학교 교수부로 복귀했다.

그해 늦가을 어느날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의 신응균부소장이 만나자는 전갈이 와 있었다.

알고보니 신부소장은 일본 육사를 나와 우리 육군 포병의 원로로서 국방부
차관까지 지낸 분으로 군사과학에도 조예가 깊어 국방과학연구소(ADD)창설의
책임을 맡고 각군 사관학교에서 두뇌를 차출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60년대 중반 한국 최초의 종합연구기관으로 KIST가 설립되었다.

미국의 바텔연구소를 모델로 재단법인 형태의 계약 연구기관으로 발족한
KIST는 산업계의 요구에 따라 연구 개발 과제를 선정하고 수행하기 위해
해외 두뇌를 유치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ADD의 설립은 그 배경이 일반적인 정부 출연 기관의 설립 목적과는
좀 달랐다.

60년대 초부터 해마다 GNP의 20%에 육박하는 막대한 군사비를 투입한
북한은 한국의 안전보장에 위협을 줄 정도로 군사력이 증강된 반면 미국은
주한 병력을 감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게다가 68년초 김신조 등의 청와대 습격 사건은 향토예비군을 결성해야
할 만큼 남북의 긴장 상태는 험악일로에 있었다.

이처럼 국가 안보가 위협을 받게 된 시점에서 미군 철수에 대비한 자주
국방 태세의 확립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여기에 기초가 되는 방위산업의 육성과 국방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한 노력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 육성과
국방 과학 기술의 연구 개발이 시급함을 강조하는 등 확고한 의지와 집념을
보였다.

결국 이같은 박대통령의 의지는 국방부에 방위산업 육성을 전담할 연구
기관을 설치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연구소의 설립은 자신의 선배이자 국방과학에 조예가 있는 신응균
장군에게 맡긴 것이었다.

그는 또한 KIST와 ADD를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을 이끌고 갈 쌍두마차로
생각한 듯하다.

결과적으로 KIST와 ADD는 한국의 산학연과 관계에 많은 과학 기술 인력을
공급했다.

물론 국방 체계를 연구 개발하는 연구소의 설립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6.25 직전에 이미 우리는 국방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한 적이 있다.

해방이 되자 일본군의 기술병과 출신들이 귀국하여 국군 창건과 함께
조병창 창설 등 병기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6.25 직전에 병기행정본부
까지 발족시켰으나 전란으로 인해 발전을 하지 못했다.

휴전후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도를 팔아서라도" 라는 강력한 의지를 보임에
따라 다시 국방부 직속으로 국방과학기술연구소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고도의 국방과학 기술을 다룰 만한 지식과 연구소를 운영할 만한
경영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연구원들은 각자 전공이나 취미에 따라 연구 과제를 수행하거나
전시 효과가 있는 로켓 제작과 시험 발사에 열중했던 것 같다.

사실 미국의 군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때라 군 장비품을 국산화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여건에서 5.16이 나자 결국 국방과학기술연구소는 발족한지 10년을
못넘기고 피복이나 식품류의 조달을 지원하는 한낱 검사기관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70년 8월 ADD 소장으로 신응균 장군이 임명되면서 창설 업무는 본격화
되었다.

각군 사관학교의 이공계 고등학위 소지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을 강화하고
시설을 확보하는 등 연구 개발 체제 정비에 들어갔다.

이렇게 ADD가 출범을 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치 않았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예비군의 장비화가 급선무였다.

특히 군의 통신 전자 장비품은 우리의 기술 수준에서 도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따라서 통신 전자 분야의 개발을 담당한다고 했지만 나에게 주어진 분명한
과제는 없었다.

그러나 방위산업 기술의 개발과 육성은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 산학계의 선배들에게 자문을 청했다.

그러나 그분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한국에서 대포나 군함 항공기 미사일
전차 등을 개발한다는 것은 꿈과 같은 얘기라는 것이었다.

소총 기관총 등을 국산화하려면 줄잡아 15~20년은 걸려야 하고 통신 전자
장비는 아예 선진국으로부터 도입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같은 비관론 때문에 군 장비품을 국산화하겠다는 우리들의 의욕은 소침
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관론 속에 새로운 사태가 벌어졌다.

어떤 예비사단에서 통신장비를 국산화했다고 칭찬을 받으려고 했던지
박대통령 방문시에 전시를 했다가 큰 일이 일어났다.

대통령이 직접 작동 시켜보라고 했는데 이 장비들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내게 그 진상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또한 같은 시기에 과학기술처는 KIST가 개발한 휴대용 무전기의 평가를
내게 의뢰해 왔다.

평가 결과는 불보듯 뻔한 일이라 군이나 KIST가 좋아할리가 없었다.

당시 KIST 소장이던 최형섭박사는 개발 당사자들의 왜곡된 보고를 받고
언짢아 했다가 평가 내용과 방법을 직접 내가 설명했더니 오히려 격려까지
해주었다.

그때 나는 국산 전자부품의 군용 신뢰도를 이미 조사해 놓았었고 국내
관련 업체들의 실태는 물론 대학이나 연구소의 실력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풍토에서 내게 닥쳐올 시련을 예측할 수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이용자인 군, 생산자인 기업, 개발자인 연구기관이 모두
통계학적 품질 관리(SQC)나 품질 및 신뢰성 보증(Q&RA)에 대한 이해가 부족
했다.

군원에 전적으로 의존해 온 우리 군은 미군의 통신 전자 장비품을 이용해
왔을 뿐 그 장비들이 어떻게 연구 개발되고 어떻게 품질이 보증되며 어떻게
생산 조달 교육 운용 정비 폐기되는지, 다시 말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관리해야 하는 군용 통신 전자 장비품의 라이프 사이클에 대한 개념이 희박
했었다.

이를테면 온도 습도 진동 충격 낙하 먼지 전자파간섭 방사 등의 극한
환경에서 기능을 잃지 않는 군용 통신전자 장비품을 연구 개발, 생산 구매,
운용 정비하는데 필수적인 요건을 군 연구소 생산업체 모두가 간과하고
있었다.

국산품은 국내 수준이 그러 하니 눈감아 달라 하고 수입품은 선진국의
것이니 따지지 말아 달라는 풍토였다.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의 기술수준도 군용 통신 전자 장비품의
연구 개발 시험 평가에 필수적인 설계 단계의 개선, 제조 단계의 신뢰성
보증과 개량, 운영단계의 신뢰성 보증과 평가 등에 대한 공학적 기반이
취약했다.

그런가 하면 전문 연구기관도 그 시설이나 연구원의 자질면에서 군의 통신
전자 장비품을 개발하는데 요구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와 갈등 속에서 ADD가 군을 대신해 요구를
제기하고 실현해야 할 군용 통신 전자 장비품의 규격과 품질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기술적 모험처럼 보였다.

이처럼 최선의 이상과 최악의 현실에서는 국산 장비품에 대한 시험평가
때문에 나 자신을 비롯해 우리 팀 전체가 뼈를 깎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결국 함께 일하던 양경갑박사는 과로로 병을 얻어 중도에 연구소를 그만
두고 말았다.

나 역시 건강을 해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잊을 수
없는 충격적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전방을 방문할 때였다.

우리가 탄 지프가 대관령을 넘는데 힘이 달려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신음하고 있을 때 민간 차량들은 비웃듯 앞질러 지나갔다.

당시 우리 군이 운용하던 통신 장비들이 지프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었다.

당장 전쟁이라도 나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에
결국 우리는 군의 통신 전자 장비의 현대화에 앞장 서기로 했다.

ADD에 와서도 나는 훌륭한 분들을 여럿 만났다.

70년 여름 나는 국회 국방분과위원들을 수행하여 일본 방위청의 연구 개발
시설을 시찰하였다.

그때 기술 연구 본부장인 호리박사를 만났다.

동경제대 조병학과를 나와 2차대전 중에는 어뢰를 개발했고 종전 후에는
교수 생활을 하다 아오야마 가쿠인대학 총장이 된 그를 방위청이 기술 개발
총책임자로 모셔간 것이다.

호리박사와 친분을 맺게 된 나는 한국의 기술 수준과 군용 통신 장비가
요구하는 기술 수준 간에 격차가 심한 현실을 털어 놓았다.

그는 "당신은 일본이 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마시오. 미국의 군사 규격
(MIL-SPEC)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절충하거나 단계별로 접근하지 마시오.
우리도 미국의 군용 규격을 만족시키기가 너무 어려워 현 실정에 맞춰 한
단계 낮은 NDS(National Defence Standard)를 적용했었소. 어는 정도 기술을
축적한 다음에 도전하자는 전략이었소. 그러나 단계별 접근 계획은 모두
실패했소.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꼭 실현해야 될 것이라면 절충하지 말고
처음부터 최종 목표를 추구해야 성공할수 있소" 라고 했다.

이밖에 미 육군성 연구 개발 차관보와 전자전연구소장을 역임한 하딘씨를
빼놓을 수 없다.

미 국방부가 ADD에 파견한 RDT&E 팀의 단장인 하딘 씨는 알고보니 70년에
열린 IEEE 서울 국제 심포지엄에서 기조 연설을 했고, 나도 "서울상공의
이온층 전자밀도에 대한 연구"로 논문을 발표해 같은 전자공학도로서 친분이
두터워졌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