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를 넘기면서 한결 서늘해진 어제 오후엔 고추밭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여름날 뙤약볕 아래 탐스럽게 익어가던 작물중 거둬들일 시기를 놓친
것은 누렇게 병이 들었고, 적당한 시기를 만난 것은 단단하고 선명한
빛깔로 여물었다.

무릇 곡식이든 인간이든 나아갈 때와 거둬들일 때를 가늠하지 못하면
추하게 병들기도 하고 아름답게 빛나기도 하는구나 싶은 생각을 하니
며칠전 실형선고를 받던 법정의 두 전직 대통령 모습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욕심없이 살아야 할 인간의 정도와 순리에 역행한 사람들이 맞이하는
서글픈 노정앞에서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랑과 증오, 일에 대한 오만과 성취욕으로 곤두박질치던 30대를 지나
어느덧 삶이란 책임과 인내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는 불혹의 의미를 깨닫는
나이가 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특별히 불행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는데 왜 순간순간들을
넘기기가 그리도 힘들었을까.

그러나 세월이 인간으로 하여금 철들게 하는 것일까.

최선을 다하고도 칭찬이 따르지 않는 것은 인격에 덕이 없음이요, 진실로
사람을 대한다 하였으나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소박하지 못한 탓이라던
아버지의 딱딱한 교훈을 이제는 섭섭함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니 한발
물러서서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세월의 연륜앞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때때로 분주한 일상으로부터 억지로라도 벗어나 한없는 고적함과
무료함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러노라면 인생은 어차피 텅빈 그릇과 같다는 삶의 허망함을 맛보고
찬바람처럼 스며드는 절대고독과 맞서볼 용기도 얻게 된다.

누구나 한번은 맞이해야 할 일몰.우리의 삶이 겸허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후회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하며
걸어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지 않겠는가.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