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

공군 생활은 내 인생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항공기 유도 무기 등 최첨단 기술이 동원되는 공군의 무기 체계라지만
운용 정비 교육 및 훈련을 비롯해 우리들의 제복에서 일용품까지 거의 모든
것이 "미국의 교리와 물자"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미군의 통신 물자 등을 어린 학생 시절부터 접해왔던 나이지만 한
나라의 국방 체계에 우리의 것이라고는 거의 볼 수 없는 기술 환경
속에서 얻은 생활 체험은 분명 충격과 동시에 기술자로서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공사 교수부는 어느 대학원보다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생도 교육에 앞서 나는 미공군의 학술 교관 과정(AIC)을 받았는데
사범대학을 나온 동기생들이 놀랄 정도로 훌륭했다.

생도 교육도 미국의 교재를 채택하여 일반 대학보다 내용이 충실했고
실험도 철저했다.

교관들은 전공별로 미국이나 일본의 신간서를 공동구입하여 윤강을
하는 등 당시의 대학보다 높은 수준의 학문을 추구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이론과 실제를 겸한 미공군의 기술 교육 자료는 미국의 대학
교재에서 정선한 것으로서 나의 미국 유학 과정에 큰 도움이 됐다.

당시의 교관들은 병역을 마치면 대부분 유학의 길을 택했다.

고인이 된 포항공대 김호길 총장도 당시 교수부 물리학과에 있었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나의 공군 생활은 "미국의 고등 교육과
군사 과학 기술"과의 만남이 되었다.

사람들이 막연히 동경하는 나라가 아니라 2백년의 짧은 기간에 과학
기술 분야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미국의 저력을 나는 실감하게 됐다.

그런가 하면 1957년 소련의 "스프트니크"에서 충격을 받은 미국이
육.해.공군의 낭비적 경쟁에 종지부를 찍고 미국립우주항공국(NASA)을
발족시킨 결단력에도 나는 감명을 받았다.

내가 미국 유학을 결심한 동기는 남보다 큰 포부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앞으로 무엇을 하든 한국에 필요한 기술자가 되기에는 나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선배들이 내게 들려주곤 하던 그분들의 포부가 영향을 주기도
했겠지만 먼 앞날의 설계나 계획에 앞서 우선 오늘 하는 일에 자신을
갖도록 남보다 단단한 기초를 닦는데 노력을 해야 한다는 나의 신조
탓이기도 했다.

그 무렵 공대를 졸업한 뒤 당장 갈 수 있는 곳이란 대학원 아니면
한전이나 상공부, 공보처나 방송국, 체신부나 전화국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공대 재학 중에 갔던 영월 발전소 실습에서 얻은 현장 업무의
체험은 나를 크게 실망시켰다.

대학원의 실상 또한 진학을 결정할 만큼 매력이 없었다.

그 역작용인지 학점이 차서 학교에 나갈 필요가 없던 졸업 학기에는
KBS아나운서 시험에 통과해 자고저 표준어 발음법 등, 요새 말로 치면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배웠으며 이 체험은 나의 사회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그 무렵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면 통신 기기 개발이나 제조
같은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그 분야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회사가 K사였다.

하지만 K사 역시 일본 등 외국에서 면허를 들여와 전선 선풍기 라디오
등을 생산할 조립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 정도의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국내 최초로 라디오 개발에 성공"하였다느니 "진공관 4구
라디오와 트랜지스터 6석 라디오의 개발 생산에 들어갔다"느니 하는 기사가
언론에 톱뉴스로 다루어지던 그런 시절이었다.

나는 그 때 내가 안고 있던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하나는 내가 추구해야 할 기술자로서의 전문성과 대학에서 배운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공군에 복무하면서
아마추어로서 또 프로페셔널로서 체험한 군의 통신 전자장비, 교육훈련,
보급 정비, 물자 관리 등에서 어떻게 하면 기술 자립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국내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경험만으로는
고도의 연구 개발, 시험 평가, 품질 보증을 알고 실천하는 고급 기술자가
되기 힘들고 남들이 개발하고 생산한 장비나 운용하는 이른바 "불랙박스
오퍼레이터"밖에 안된다는 깨달음이었다.

이같은 문제를 동시에 풀어가는 방법으로는 미국 유학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또는 대학 재학 중에 유학을 떠난
학우들이 있어 나도 유학에 대한 생각이 없지는 않았었다.

대학 2,3학년시절로 기억되는데 미국의 해외개발본부(FOA)의 원조로
서울대학교의 의대 농대 공대가 미국의 미네소타 대학으로부터 교환교수,
실험 실습 기자재 지원을 받고, 당시 의대 교수였던 나의 셋째 삼촌도
이 계획에 따라 미국의 여러 대학을 다녀오셨다.

이처럼 주위 분들의 미국 대학에서 얻은 견문은 간접적으로나마
미국을 내게 더 가까운 나라로 인식시켜주었으며 이같은 친근함은
그 무렵 서울공대를 방문한 미네소타 전기공학과의 라슨(Larson)교수와
대화를 하고, 또 외국인과 만나 영어를 할 기회가 있으면 서슴지 않고
나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미국 유학의 기회를 만들어주신 분은 공군사관학교의
신상철 교장님이다.

내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안 신상철 교장님은 나를
고문관으로 있던 램셔 중령에게 소개해 주셨다.

램셔 중령은 내게 미국의 대학 교육에 대해 소개해 주고 미국에 가면
나의 적성에 맞는 커리큘럼을 짤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리고 군인의 신분이면서 민간 대학에 가서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미공군
공과 대학(USAFIT)의 민간 대학 프로그램(CIP)이 있으니 응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통신 전자 전기 특기와 교육 특기의 장교 여러사람이 응시하였는데
나 혼자만 USAFIT에서 합격 통지를 받고 텍사스 A&M 전기공학과로 가게
되었다.

(미국은 통신이니 전기니 구별을 하지 않았다)이러한 기회는 그전까지의
관례로는 사관학교를 나온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특전이었다.

물론 신상철 교장님의 특별한 배려이었지만 반면에 나로서는 공군에
장기 복부를 약속해야 하는 중대한 결심을 함께 해야 했다.

나는 미국에 가서 학부과정을 다시 밟았다.

전공을 바꾼 탓도 있었지만 미국에 가서 보니 학부를 거치지 않은 미국의
고등학위는 사상누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학부 과정을 밟으면서 미국 대학 교육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으며 보다
많은 교수들을 알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통해 미국 학생들과 격의없이 교류하고 취미 생활로
아마추어 무선 애호가들이 즐기는 각종 송수신기 키트인 히드키트(Heathkit)
조립과 레코드 수집에도 열을 올렸다.

나는 평범한 주립 대학에 다니면서 그들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고등
교육의 이념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또 젊은이들에게 신사도와 애국심을 가르치는 ROTC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을 제치고 미국이 노벨상을 휩쓸게 된
데에는 흔히 유럽의 과학 기술자들이 전쟁을 피해 대거 이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 모릴법에 의해 링컨 대통령이
각주에 국유지 교부 대학을 설립한 백년대계의 교육 정책 때문이며
학부를 마치면 다른 대학으로 진학하는 전통을 만들어 대학간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등교육 제도에서 1백년만에 전세계를 압도하는 과학기술 패권
국가가 된 요체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미국 유학 기간 동안 큰 가르침을 주신 훌륭한 교수님이 여럿 계시지만
특히 학위 지도 교수를 맡아주신 저먼(John.P.German)선생님은 나에게
학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과 기술자가 지켜야 할 신조와 집념을 가르쳐
주셨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극비에 속하는 레이더 교육을 MIT에서 받고 버마
전선에 참전하기도 한 저먼 선생님은 통신기 레이더 등 전자 병기를 공중
투하로 받고 보니 거의 파손되어 전쟁에 쓰지도 못하고 고생만한 그때의
체험을 말씀해 주셨다.

포장 기술도 연구해야 되는 군장비 연구 개발의 특수성을 역설하시는
등 여러 가지 산 교훈을 나에게 주셨다.

떠날 때 약속한 유학 기한이 끝날 무렵 미공군과 텍사스 A&M에서 모두
박사과정을 위한 장학금을 받고 고민했으나 일단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귀국해서는 미국에서 막 시작된 연구 과제로서 인공위성에서 발사된
전파를 이용하여 전리층의 전자 밀도를 측정하는 연구에 우리 공군이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공군사관학교에 전리층 관측 연구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또한 HM1BX라는 호출 부호로 아마추어 무선국을 개국하고 KBS의 이인관
기감님의 사위가 됨으로써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결혼 후 나는 다시 저먼 교수님의 부름으로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텍사스 A&M으로 돌아가 계획했던 박사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의 한국은 산업 국가가 될 수 있는 기반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만큼 장래가 불투명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이런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미국 유학을 하는 동안 나는
몇 가지 신념을 굳히게 되었다.

하나는 우리 나라의 통신전자 산업에 품질과 신뢰성을 중시하는 풍토를
조성하는 데 앞장 서는 기술자가 되겠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평범한
사람들을 데리고 비범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기술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이 시대의 사회적 소명을 위해서 당장의 평가보다는
먼 훗날의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신념은 귀국 후 국방과학연구소 창설에 참여하면서
나름대로의 소신을 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