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고급품 전문 상점인 베이앤코프백화점과 V&D백화점의 캐주얼
의류코너.

네덜란드에서도 부유층 사람들이나 이용하는 이곳에는 한벌에 200만원이
넘는 옷들이 매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는 "검지와 중지를 쭉 펴서 V자 형태를 그린 손" 모양의
상표를 단 옷들이 눈에 띈다.

바로 한국인 박영신사장(45)이 운영하는 박스(PAK"S)무역의 "VINCISTAR"란
브랜드다.

2차대전 당시 영국 총리 처칠이 말없이 두 손가락을 펴 보여 승리(Victory)
를 다짐한 뒤로 이는 "승리의 상징"이 돼 버렸다.

라틴어에서 따온 "VINCISTAR"에 담긴 뜻도 다름아닌 "승리의 기상" "승리의
기백"(Sprit of Victory).

한국인의 "승리의 기상"이 담긴 가죽제품이 네덜란드 고급 의류시장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 8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근교 알스미어시에서 "박스무역"이란
조그만 간판을 걸고 사업을 시작한 박사장은 이제 유럽과 미국 등 전세계
10여곳에 전문 딜러망을 두고 연간 1,5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적
기업의 경영인이 됐다.

이 회사는 캐주얼 가죽의류 신발 등을 취급하고 있으며 전세계 33개국에
상표등록돼 있다.

박사장이 네덜란드 땅을 처음 밟은 것은 지난 76년.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A종합상사에 입사한지 3년만에 네덜란드 주재원
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유럽은 현재의 EU(유럽연합)로 확대된 EC(유럽공동체)통합의 거대한
물줄기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유난히 EC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박사장은 마침 암스테르담 대학에 새로
개설된 "EC통합 연구과정"에 등록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네덜란드에 남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될 줄은 그도 몰랐다.

대학과 직장을 오가며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생활을 얼마간 계속하던
중 본국발령이 난 것이다.

결국 그는 직장과 학업중 공부를 선택했다.

지난 80년 연구과정을 모두 마치고 본격적인 사업의 길로 들어섰다.

그간 종합상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의류무역업을 선택했다.

사업시작후 맨처음 부딪친 어려움은 환율변동에 따른 환차손이었다.

당시는 미달러 대 네덜란드 길더의 환율이 1.7에서 3.8까지 심하게 요동
치던 시절이었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이익이나 손실은 유통이익을 훨씬 능가했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시기"는 5년 정도 지속됐다.

"지금 저희 회사의 위기관리능력이나 미래 예측력은 모두 당시의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생긴 것입니다"

또 한번의 뼈아픈 어려움은 한국의 납품업체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꽤 명성을 쌓고 있던 이 업체가 당초 주문한 샘플과 전혀 다른
저질의 제품을 공급해 "박스무역"의 거래선이 끊기고 매출도 절반으로
떨어져 버린 것.

당시 박스무역은 의류 딜러망을 확충하고 유명 의류체인등 거래선을 확보해
탄탄한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독일 최대 유통업체의 하나인 칼슈타트(KARSTAT)사와도 연간 100만달러가
넘는 규모로 가죽의류 납품거래를 하고 있던 터였다.

지난 91년 이 회사로부터 기획상품으로 판매할 제품을 주문받고 박사장은
보다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납품할 생각으로 기존의 중소형 하청공장이 아닌
상당한 규모와 명성을 가진 한국 회사에 선주문 의뢰를 했다.

그러나 막상 납기일이 돼도 물건은 오지 않았고 재촉에 재촉을 거듭해
받아본 제품은 샘플과 전혀 다른 디자인과 원단을 사용한 저질품이었다.

이 기획상품을 독일 전역에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판매준비에 들어갔던
칼슈타트사는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이에 더이상 박사장을 믿을 수 없다고 보고 아예 거래관계를 끊어버린 것.

600만달러가 넘던 연간 매출액은 300만달러로 뚝 떨어졌다.

박사장은 "우리 동포들의 신용이 이 정도인가"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배신감마저 느꼈다.

"거래관계에서는 상도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특히 수출한국의
최일선에서 활동하는 많은 무역인의 의욕을 빼앗는 부도덕한 상행위나
제품을 만들 능력도 없으면서 의욕만 앞세우는 "무례한" 기업인들은
"메이드 인 코리아"의 국제화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근절돼야 해요"

"기업인을 비롯한 개개인의 의식이 후진성을 벗어나야 기업의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그의 생각은 "박스무역"의 조직구조나 경영기법에도 잘 나타나
있다.

디자인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생산은 중국과 인도에서, 광고및 기업
이미지 창출은 영국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네덜란드 본사에서는 판매.
유통만 담당하는 "토털 네트워크" 체제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조직을 구성하는 인력을 들여다 보면 디자이너 5명을 제외한 전 직원이
마케팅 전문가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각양각색이어서 사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서류 작성에는 영어를 사용하고 대신 직원 전원이 유럽 어느 곳에서도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언어의 장애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활동하고
있다.

승리의 V자를 표시하는 "VINCISTAR"상표를 개발한 것은 지난 83년이었다.

"독자 브랜드가 기업의 흥망을 좌우할 것"을 일찍부터 간파한 박사장이
거액을 투자해 연구개발한 것이다.

"저가품이라는 이미지가 바이어에게 박혀있을 때는 1%의 가격차이만 나도
발길을 다른데로 돌려버립니다. 그러나 소비자에게 그 브랜드가 "이미지화"
된 상품은 조금 비싸도 거래를 끊지 못하지요. 손님이 찾으니까요"

박사장은 요즘 제품 구매를 위해 중국에 출장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중국이 우리를 무섭게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고.

그는 특히 중앙정부의 지원하에 각 성에 설립된 "전문무역인 양성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젊은 무역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이 적재적소에서 활동하며 중국 무역의 중심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무역전문가 양성에 더욱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93년 "EU 경제사회 위원회"는 "유럽 젊은이들의 미래"라는 주제로
연석회의를 열었다.

그는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여기에서 주제연설을 했는데 이때도 "젊고
패기있는 무역인"의 양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 자신 전문 무역인 양성을 위해 아낌없는 교육투자를 해 왔다.

그다지 크지 않은 회사 규모에도 불구하고 매년 한국과 유럽 소재 대학에서
우수한 인력을 선발, 장학금을 지급하며 졸업후에는 박스무역에서 6개월간
인턴교육을 시키고 있다.

현재 이 과정을 수료한 학생 수는 50여명에 달한다.

"박스무역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올들어 박사장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보나미 텍스"라는 국제경영컨설팅사를 설립, 한국 기업들의 세계시장
진출을 자문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15년간 박스무역을 이끌면서 형성해온 인맥과 자신이 창립멤버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내 "국제경영 법률연구소" 인맥을 적극 활용해 운영하는
이 사업을 박사장은 ""VINCISTAR" 브랜드의 세계화와 전문무역인 양성에
일조하기 위한 노력의 중간 결실"이라고 자평한다.

박영신사장은 유라시아의 동쪽 끝인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사업은 서쪽 끝
네덜란드에서 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꿈은 유라시아를 무대로 한 대륙 경영이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유라시아를 경영하겠다는 포부와 배짱을 가지고
능력을 키워가야 합니다"

앞으로 10년안에 "VINCISTAR"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돋움시킨다는 야심찬
청사진을 하나 둘 실현시켜 가고 있는 "유라시아 경영인" 박사장이 한국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