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태 < 산업연구원 부원장 >

많은 사람들이 경제를 걱정하고 있다.

경제가 위기이건 아니건 간에 오늘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 해결책을
찾아내서 보다 나은 내일을 가꾸어 나가자는 의지는 바람직한 것이며
결코 탓할 일이 아니다.

변화와 개혁은 위기의식이 없으면 성공하기 힘들다.

그런데 위기의식이란 반드시 현상태가 위기이다 라는 의미만은 아니고,
현재의 문제들을 방치하면 위기가 닥쳐올 것이다 라는 의미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후사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감하고
있음을 볼 때, 지금이야말로 우리 경제의 제도를 개혁하고 의식과 행동을
바꾸어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들이 평행을 달리면서 좀처럼 합일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정책이 갈팡질팡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하고,
기업에서는 정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다고 불평한다.

중요한 경제현안에 내해서 국론이 분열에 빠져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지나치게 당위론에 치우친 나머지 실질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당위론에 치우치면 사고가 단편적, 근시안적, 배타적으로 흘러가서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립과 갈등이 더욱 증폭되기만 한다.

경제에서도 당위론에 지배하면, 문제해결은 되지 않고 논쟁만 무성해진다.

안정과 성장, 성장과 복지, 또는 정부와 민간은 원래 수레의 두 바퀴와
같기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하나도
따라서 사라진다.

이 간단한 이치를 우리 모두가 깨우친다면 경제난국의 타개책에 대한
실마리가 쉽게 풀리리라고 믿는다.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한 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적어도 경제문제에
관한한 공허한 논쟁에 휩쓸리지 않고 문제해결 중심의 실용적인 태도를
지녀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발전전략을 일컬어 흔히들 정부주도 시장경제라고 한다.

정통경제이론에서 보면 원래 정부와 시장은 대립관계에 있는데 어떻게
이런 모순되는 체제하에서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 해답은 바로 실용주의적 사고이다.

즉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살리면서 저발전단계에서 시장이 갖는 한계,
예컨대 저축과 자본의 부족, 경제하는 마음의 결핍, 자유공정 경쟁풍토의
미흡 등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부가 개입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꿩잡는 것이 매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실용주의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목표달성 또는 문제해결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경제정책의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가 먼저 분명해져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 국민들의 대부분은 국가경쟁력이 중요하고 고비용.저효율
구조의 타파가 절실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의식이 깨어 있다.

노동조합도 조합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노사 협력으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부는 이익집단들의 국가경쟁력이라는 명분을 빌미로 해서
자기 실속을 먼저 챙기려고 하는 반칙을 못하도록 엄징하게 감시해주면
된다.

실용적 접근에서 다음에 생각해야 할 것은 고비용.저효율구조의 타파를
위해서 경제운용의 틀을 어떻게 짜야 되는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고비용의 내용과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경제 각 부문이 왜 효율성이 낮은 지에 대해서도 전략 알고 있다.

그 해결방안 중에서 SOC처럼 정부의 예산지출이 필요한 사업은 예산을
우선 배정하여 차근 집행해 나가야 되고, 임금안정과 금리안정처럼 제도
개혁이 필요한 부문 역시 정부가 해야 한다.

또한 정부는 정부조직의 효율성을 점검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하여 차질없이
실천에 옮겨야 한다.

고위 공직자를 비롯하여 공공부문의 인사에 있어서도 조직의 혁신에 대한
적극적 태도와 과감한 실천여부를 기준으로 삼으면 국민들은 정부를 믿고
박수를 보낼 것이다.

민간부문의 변화와 개혁은 어디까지나 민간의 몫이지만 정부역시 변화를
유도하는 제도의 구축과 분위기의 조성으로 큰 몫을 할 수 있다.

효율적인 기업이 살아남고 비효율적인 기업은 도태되는 자유공정경쟁시장이
작동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규제완료는 과감히 해야되지만, 공정경쟁을 위한
규제는 강화되어야 한다.

항산 노란의 대상이 되는 기업집단의 문제를 보면, 우리의 금융현실하에서
대기업집단이 갖는 자금동원력을 진정한 경쟁력요인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서면, 정책방향도 분명해 질 수 있을 것이다.

WTO(세계무역기구) 체제에서의 산업지원체제 역시 실용적 바탕위에서
마련될 필요가 있다.

부품을 포함하는 자본재산업의 발전은 무역수지균형의 전제조건인데
WTO체재에서는 특정산업육성정책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하지 말고, 기술개발
제품표준화 M&A를 통한 대형화, 인력개발 등 허용되는 지원책을 슬기롭게
원용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세종대왕께서는 백성을 어여삐 여기시어 실용의 정신으로서 한글과
측우기를 발명하셨으나, 그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이데올르기에 집착하여
경제와 기술을 천시한 나머지 나라까지 빼앗겼다.

이제 우리는 실사구시의 정신을 회복하여 선진에의 길을 앞당겨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