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섬 부설 한효과학기술원 최의주박사(39.세포생물학실장)는 지난
5월18일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영국으로부터 막 전송되어온 팩시밀리용지를 받아든 순간 전신을
감쌌던 "해냈다"는 희열을 좀처럼 잊을수 없다.

팩시밀리의 내용은 간단했다.

"귀하의 논문을 6월27일자 네이처지에 싣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10월 첫 논문을 보낸후 7개월간 4차례에 걸쳐 수정.보완한
원고를 주고받으며 기다려온 회신이었다.

심재경 박지현 이희정 김한신등 논문작성을 위한 실험을 맡았던
연구원들과 함께 곧바로 여의도 63빌딩 부페에서 축하연을 갖고 기쁨을
만끽했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네이처지는 게재할 논문선정과정이 엄격하기로
악명(?)높다.

신청된 논문중 5%만이 최종 선택될 정도이다.

그런만큼 게재된 논문은질적인 면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네이처지에의 논문게재는 그래서 전세계 모든 과학자들의 도전대상이며
꿈이다.

네이처지에 우리나라 과학자의 논문이 실리는 것은 드문일이기에 최박사의
논문게재는 더욱 빛났다.

실제로 윤한식박사(한국과학기술연구원 명예연구원)가 고분자아라미드섬유
연구논문을 지난 87년 게재한 이후 10년만에 처음이었던 것이다.

최박사는 "스트레스활성 단백질 인산화효소(SAPK)의 억제단백질 P21"이란
제목의 이번 논문을 통해 세포사멸의 생화학적 작용기제를 밝혀냈다.

사람이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는 것은 대개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죽기
때문이다.

X선, 자외선, 열충격, 돌연변이성 화학물질등 각종 스트레스를 받으면
SAPK가 활성화되고 그 결과 세포사멸현상이 일어나 암, 퇴행성 뇌신경질환,
면역계 질환, 심장혈관계 질환등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즉 SAPK의 활성화를 억제하면 세포사멸을 막을수 있는데 "P21"이란
단백질효소가 그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새로이 밝혀낸 것이다.

최박사의 이번 연구결과는 면역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사멸되면서 발생하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나 뇌세포의 퇴행으로 발병하는 알츠하미머병등
세포사멸에 기인하는 여러 질병치료에 새로운 가능성을 던져준 것으로
평가받고있다.

서울대 약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거쳐 하버드대 생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워싱턴의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최박사는 당초
미국생활을 지속하려 했었다.

그러나 연구활동의 자율성과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93년12월
한효과학기술원에 합류했다.

박사 13명을 포함 70명의 연구인력을확보하고 있는 한효과학기술원은
한일그룹이 의약개발등 기초연구를 위해 지난 91년7월 세운 민간연구소.

G7과제의 하나인 "HT003계열종양괴사인자 항암제개발" 연구를 마무리짓고
임상시험을 앞두고 있으며 "바이러스신농약개발"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는 한효는 네이처지와 쌍벽을 이루는 사이언스지에 한국의 과학기술을
선도할 유망연구소로 소개되기도 했었다.

최박사는 현재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신경세포 사멸과 관련돼 있는
"글루타메이트"라는 아미노산의 생화학적 작용기제 규명을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아쉬움이 없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자세로 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최박사가 또한번 국내외 과학자들의 부러움을 살지 지켜볼 일이다.

< 김재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