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무역은 국가경제상 중요한 역할을 점유할 것임은 경론할 필요가
무하거니와...(중략) 요컨대 경제를 생각하지 아니하는 정치가 없고 산업과
무역이 없이는 경제발전을 도모치 못하는 철칙에 의하야...(중략) 전국내
무역업자, 무역경제에 관한 지식경험있는 인사를 망라하여 본 협회를
조직코저 하는 바이다"

해방직후의 혼란이 아직 수습되지 않은 46년 7월31일 조선식산은행(현재의
한국산업은행) 별관에서는 이런 선언문이 낭독됐다.

바로 "수출한국의 메카" 한국무역협회의 탄생을 알리는 설립취지문이었다.

당시 회원은 105명.

초대회장은 김도연씨였고 창립회원으로 아직 생존해 있는 기업인으로는
최태섭한국유리 명예회장과 김각중 경방회장 등이 있다.

이렇게 출발한 무역협회는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을 세계 12위의 무역대국
으로 이끄는 향도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수많은 일화도 남겼다.

<>.53년4월 전쟁의 와중에 열린 제7회 정기총회는 무역협회 창립이래
최초의 정치적 파란속에 치러졌다.

48년부터 회장직을 맡아온 이활회장이 정치적 압력으로 사표를 내던진
것.

이회장은 53년초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상공부장관이나 주영대사직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평소 이대통령의 인사정책과 프란체스카여사의 정치간섭을 마땅치
않게 생각해 온데다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자였던 이회장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정부로부터 "야당계 인사"로 낙인찍히게 됐고
나중에는 정부관계자와의 업무상 면담마저 거절당하게 됐다.

사태가 이쯤되자 이회장은 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없게 됐다고
판단, 스스로 회장직을 물러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협회장 자리에는 정치권의 입김이 작용, 이회장의
뒤를 이은 임문환 최순주 강성태회장 등이 모두 정치적 영향에 의해 임명
됐다.

한편 사사로운 욕심을 떠나 소신을 지켰던 이회장은 4.19직후 제8대회장
으로 복귀해 73년까지 13년동안이나 무역협회를 이끌었다.

<>.지금은 55층이나 되는 무역회관을 갖고 있는 무역협회지만 한때는
셋방살이를 해야 했고 그나마 어렵사리 마련한 회관마저 남에게 빼앗길 뻔한
적도 있었다.

휴전후 서울로 돌아온 무역협회는 임시로 소공동 대한상의 건물 3층에
사무실을 마련한 후 현재의 미도파백화점건물을 무역회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 건물의 소유주였던 정부측과 교섭에 나섰다.

그런데 어느날 난데없이 대한부동산주식회사라는 회사가 나타나 건물을
수리하겠다며 공사허가판을 붙였다.

알고보니 대한부동산주식회사는 현모라는 사람이 서류상으로 설립한
회사였고 그는 정부 고위관리의 힘을 빌려 이 건물의 임대계약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협회측의 "백 그라운드"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협회회장인 최순주씨는 이대통령의 측근이었고 강성태상공부장관도
한때 협회 전무를 지낸 인연이 있었다.

협회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들은 강장관은 이를 즉시 경무대에 보고했고
이대통령은 관재청에 대한부동산과의 계약을 파기토록 지시했고 무협은
가까스로 회관건물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수출업계의 가장 절실한 요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수출자금의
지원이고 이를 위해 70년대초에는 협회가 "무역은행" 설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69년 수출특계가 신설되자 업계에서는 이 자금을 이용하여 무역은행을
설립하자는 의견이 대두됐고 71년4월에는 협회가 무역은행 설립안을 만들어
정부에 제출했다.

협회의 이같은 안에 상공부는 대체로 동의했으나 재무부쪽에서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현행 금융제도로도 수출지원은 가능하며 금융정책의 일관성 면에서 특수
은행 신설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리였다.

결국 무역은행 설립안은 백지화됐고 대신 특계자금으로 당시 정부가 소유
하고 있던 상업은행 주식 25억원어치를 매입하여 제1대주주가 되는 절충안이
채택됐다.

그러나 금융자율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1대주주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은 몇몇 이사가 상업은행으로부터 다소 무리한 융자를 받는 정도였고
그나마도 증자과정에서 협회의 지분율이 계속 낮아져 나중에는 일반주주나
다름없게 됐다.

<>.무역은행이 재무부의 반대로 무산된 경위와 비슷하게 무협이 추진했던
"무역대학원" 설립도 유관부처간의 이견으로 무산됐다.

협회는 69년 격화되는 무역전쟁에 대응해 무역인재를 양성한다는 취지에서
"한국무역대학원" 설립안을 마련, 정부에 제시했다.

무협이 만든 안은 무역대학원설립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 정부와 협회가
각 50%씩 출연한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입학생은 4년제 대학 상과 경제학과
등 무역관련학과 졸업생중 실무경력 1년이상인 자로 한다는 것이었다.

무협은 대학원설립을 위해 미국의 선더버드대학 일본의 무역센터 이태리의
IRI 등 세계적인 무역전문교육기관의 커리큘럼을 조사하고 각 분야의 국내
학계인사를 물색하는 등 구체적인 준비까지 마쳤다.

그러나 당시 문교부 당국에서는 이 대학원을 문교부 소관법령이 아닌
특별법으로 설립한다는데 대해 반대하고 나섰다.

반면 상공부에서는 소관단체인 무역협회가 문교부산하에 무역대학원을
설립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양부처는 서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협회의 무역대학원 설립은
무산되고 말았다.

대신 성균관대학측에서 이 계획을 떠맡겠다고 나서 71년2월 국내대학중
처음으로 성균관대학교 무역대학원이 설립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이 무역대학원은 무역협회가 준비했던 커리큘럼과 교수진을 그대로 수용해
전문무역인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협회가 현재의 삼성동 무역회관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회현동
무역회관 건립과정에서는 회장이 건축법위반으로 고발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초 협회의 회관신축 터로 검토됐던 곳은 안국동이었으나 이활회장은
"안국동은 방위로 보아 수구적인 경향이 강해 골동품상 자리로나 좋지
진취적이어야 할 무역협회가 정착할 곳은 못된다"며 반대했다.

이에 관계에 발이 넓었던 박종식부회장이 찾아낸 곳이 회현동 2가의
남산세무서 공터였다.

문제는 건물을 다 짓고나서 발생했다.

당시는 건축허가조건이 까다로운 반면 일단 짓고난 건물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협회도 건축과정에서 허가면적을 일부 초과했지만 별일 있겠느냐는 생각에
입주부터 했다.

그러나 건축관련 감사과정에서 이 사실이 드러나 대표자인 이활회장과
협회측이 검찰에 고발됐고 결국 각각 5천만원의 벌금형이 선고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무협이 87년 개통한 KOTIS(한국무역정보서비스)는 그 이름을 남덕우
당시 회장이 직접 작명했는데 이 이름과 관련해서는 두번의 상표권 분쟁이
일기도 했다.

89년 무협이 이 상표를 특허청에 막 등록하려던 차에 마침 한진그룹계열의
한국여행정보(주)가 항공사 공동예약 온라인 서비스의 이름을 KOTIS(Korea
Travel Information Service)로 사용하기 시작, 이의신청을 제기했다.

특허청의 심사결과 무협의 상표출원 등록이 인정돼 한진그룹은 다른 이름을
사용해야 했다.

또 한번은 95년4월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연구개발정보센터에서 일한자동
번역시스템을 개발해 홍보하면서 각 신문의 기사나 홍보물, PC통신 등을
통해 KOTIS/JK라는 이름으로 제품을 선전했다.

이에 협회는 과기원에 즉각 공문을 보내 항의함으로써 다른 이름으로
바꾸게 했다.

< 임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