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또 한번의 새로운 출발이 있게 된다.

정년은 인생이 끝나는 곳이 아니다.

사람을 만들어 내는 완숙기를 향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대학같은 졸업식을 영어로는 코멘스멘트(commmencement)라고 하지만 이말은
본래 업을 마치는 것이 아니고 업을 시작하는것, 즉 졸업이 아니고 시업을
의미한다.

정년은 제2의 코멘스멘트가 되는 것이다.

옛날 공자는 "50에 천의 명을 알고, 60에 듣고 따른다"고 했는데, 범인은
50이나 60이 되어도 자기자신과 자기의 인생을 총괄하는 것은 아직 빠르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긴 세월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자기의 한계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가능성은 자신도 모르는 것이 보통이다.

인간의 잠재 능력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주어진 능력을 모두 발휘하고 세상
을 떠나는 사람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스스로 주어진 천의 명을 알고, 참으로 천수를 다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없다는 것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1875~1910)은 사람의 일생동안 사용하는 것은 가지고
태어난 능력의 50%정도라는 설을 내놓았다.

그런데 융 이후의 관련연구에서는 이 비율은 더 줄어들어 최근에는 수%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즉 인간은 주어진 능력의 대부분을 사용하지 못하고 무덤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인간에게는 많은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잠재능력에는 넘쳐서 쇠퇴를 면할 수 없는 유동성의 능력도 있을 것이다.

한데 전적으로 노력에 의존하여 연령과는 관계없는 결정성의 능력이 있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인생은 최후까지 챌린저가 아니면 안되기도 한다.

도전은 또 외측의 도전뿐만이 아니다.

내측의 도전도 있다.

외적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으므로 알려지는 것도 적지만 내측에 있는
인간의 생명을 더 깊게 해주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능력은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풍족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실제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은 거의 예외없이 고령자들이다.

인간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와같은 인격은 긴세월 부단의 수련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주변에도 이런 고령자들은 얼마든지 찾아볼수 있다.

정열적으로 있는 힘을 쏟는 마음에 코메트(혜성)가 있을때 이것을 청춘
이라고 한다.

청춘은 젊은이들만의 특권은 아니다.

젊은이 중에도 늙은이가 있다.

"늙는다는 것은 나이가 아니다. 배우는 것이나, 하던 일을 그만두는
것이다"

프랑스작가 사강은 "10대에도 노인이 있고 60이 되어도 젊은이가 있다"고
했다.

"청춘이란 인생의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양상을 말하는 것이다.
뛰어난 창조력, 뛰어난 의지, 타오르는 정열, 비겁을 물리치는 용맹심,
안이를 털어버리는 모험심 이와같은 양상을 말한다. 나이만 들었다고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었을때 비로소 늙게 된다... 사람은 신념과 같이
젊고, 의혹과 같이 늙는다"

늙어지는 것이 연령과 무관한 것과 같이, 청춘도 연령과 관계는 없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도 청춘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하나의 나를 생각할 수 있다.

즉 참다운 나, 혹은 초아, 나를 초월하는 나, 제일 좋아하는 말로는 고아.

봄의 꽃, 여름의 푸른잎, 가을의 단풍 모두 아름답지만 겨울나목의
아름다움은 매우 각별한 것이다.

꽃이 떨어지고 잎이 떨어진 가지에 눈이 쌓여 햇볕이 쪼이는 겨울 나무의
전망은 제일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나 지위같은 것을 초월한, 명함같은 것을 문제로 하지 않는, 그러한
나의 도래-거기에 도달하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정진이 필요한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의 청춘은 고아의 청춘인 것이다.

앞으로 남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국가선진화에 공헌하는 것이 큰
보람이요, 완숙된 생활인 것이다.

조본구 < 의정부시 / 대한삼락회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