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4년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무역박람회.

이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 행사에는 미얀마현지에서 한국 기술진과
한국산 설비에 의해 생산된 새담배 "폴로나인"이 첫선을 보였다.

개막식날 행사장 한 구석에서는 한 중년의 한국인이 참석자들 뒤에서
남몰래 감격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지금은 미얀마에서 가장 성공한 외국인 사업가가 된 "한국
호랑이" 김주성사장이다.

""폴로나인"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저는 직장도 던져 버렸습니다. 저의
모든 시간과 노력은 물론 전 재산까지 걸었지요"

새 담배 "폴로나인"은 미얀마의 연초집산지 파코쿠의 6만6,000평 대지에
세워진 그의 연초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다.

이는 그가 미얀마에서 손꼽히는 사업가들을 끌어들여 설립한 산업개발회사
"글래이시어"사와 미얀마 전매청이 합작으로 투자해 세운 공장.

김사장은 미얀마에서의 이 첫사업을 위해 자기 재산을 담보로 한국에서
차관을 들여오기까지 했다.

차관획득이 어려웠을 때 보여준 그의 신의와 희생은 그의 동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놓았고 지금은 미얀마 최대의 재력가가 된 그들이 가장
믿음직한 친구로 그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파코쿠의 "폴로나인" 생산공장은 지금은 미얀마 공업1부 산하의 여러
합작투자회사들중 가장 성공한 합작투자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흑자율
도 제일 높아요"

김사장은 온 나라가 중동붐으로 들썩들썩하던 지난 76년 현대건설에 입사
했다.

본사의 L중역 밑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 해외지사 해외현장에서 일을 익힌
다음 그룹내 핵심두뇌인 J중역을 만나 인간적 감화를 받는다.

그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면서 그룹내 주요 기구들과 신규사업 창설에
참여하는 등 바쁘게 지내다보니 어느덧 8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일에 지친 그가 휴식을 찾고자 했던 공간은 해외근무지였다.

84년 그는 선배가 자리를 비운 미얀마 근무를 자원했다.

연간 수출입 총규모가 몇억달러에 불과한 소규모 경제의 미얀마에서
현대건설이 하던 수억달러규모의 수력발전소공사는 이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할만 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도 밤낮없이 일해야 했다.

양곤지점장으로 수백 떨어진 현장을 지원할 때 이사이던 현장소장이 차장인
그를 상무라고 빗댈 만큼 억척같이 일을 챙겼다.

미얀마 역사상 최대프로젝트가 완벽하게, 그것도 6개월을 앞당겨 완공
되었을 때 미얀마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흥분했다.

그것이 북한의 외교우세에 눌리던 한국의 위상를 뒤바꿔 놓았고 한국
기업들의 미얀마진출 봇물을 터주는 계기가 됐다.

공사를 끝낸 회사는 미얀마에서 탄탄한 명성을 얻고 국위를 선양했지만
실제 손에 남은 것은 현지화폐뿐이었다.

공사계약서상 공사대금은 현지화폐로 결제됐고 인건비등으로 쓰고 남은
현지화폐는 환전을 할수 없도록 명시돼 있었던 것이다.

시장환율로 치면 수십만달러에 불과했지만 공식환율로 환산하면 200만달러
가 넘었다.

당시의 200만달러면 현대건설로서도 무시못할 큰 돈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구제할수 없었던 것이 객관적 상황이었다.

한국대사관에서도 미얀마의 경제형편에서 그런 큰 돈을 계약조건에 반하여
기대한다는 것은 기대조차 할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4년이 지나서 그는 당시 미얀마 국가총외화보유고 2,000만달러중 10%인
200만달러를 마침내 받아냄으로써 본사는 물론 현지 당국자들까지 경악
시킨다.

"이 얘기는 저의 성공담이기 이전에 미얀마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로
보아야 합니다. 가난하지만 당당한 미얀마 정부의 자존심과 용기, 이해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미얀마 사람들의 가치기준 등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어요"

그가 미얀마정부를 설득하는데 성공할수 있었던 것은 뚝심과 부지런함이
일궈낸 작품이었지만 논리를 찾는 과정에서 그는 현지의 역사 사회 경제
문화 의식체계를 터득하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격의없이 사귀게 되는
기회도 가질수 있었다.

참으로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도왔다.

"제가 그들과 제일 많이 나눈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제와서는 그것이
돈 주고도 살수 없는 제 피와 살이 됐어요"

92년 큰아들이 현지의 명문 미국학교에 합격해 그를 기쁘게 했다.

그런데 이때 본사에서 귀국명령이 날아 왔다.

펄펄하던 37세에 미얀마로 와서 소위 "인생의 황금기"를 다 바쳤던 그는
나이 45세에 비로소 독립을 결심한다.

그가 사표를 내고 설립한 회사가 바로 미얀마 정부공장 민영화에 대비,
산업개발을 목적으로 한 "글래이시어"사다.

그가 끌어들인 동업자들은 당시 새롭게 시작한 미얀마 시장경제를 말아먹기
시작한 대재력가들로 "호랑이들"이라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한 회사에서 이해관계를 같이하기로 한 것은 드물고 큰 사건이었다.

또 그러한 변혁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수권자본금 1억차르의 대기업 사장이 된 그가 벌인 첫 사업은 전매청과의
합작투자.

까다롭기로 소문난 공업1부와 손잡고 해외투자심의회로부터 합작투자허가를
어렵게 받아 냈던 그에게 들이닥친 커다란 숙제는 투자자본의 염출이었다.

자본을 투자하기로 했던 호랑이들은 한푼도 낼 생각을 안했다.

군사정부하에서 자신들의 알토란같은 부를 공개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93년만 해도 군사정권하의 미얀마 정국은 철저히 엎드려 있지 않으면
귀신도 모르게 채가는 형국이었다.

이사회에서도 서로를 못믿고 두려워했다.

수백만달러를 해외에서 조성해서 반입해야 합작투자가 되는데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답답한 것은 김사장이었다.

호랑이들이야 첫사업이 성사 안돼도 상관없었지만 그는 그 사업에 1년
이라는 시간과 돈을 이미 투자했고 이젠 돌아갈 직장도 없었다.

합작투자 계약 후 성사를 시키지 못하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 나라에서는
끝장이었다.

결국 그는 전 재산을 은행에 넣고 한국에 있는 두 선배의 도움으로 차관을
반입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한마디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가 종업원 1,000명 가까운 기존 공장을 인수, 350명으로 줄이고 생산
체제를 정비할 때 정부측은 물론 호랑이들까지 미얀마는 한국이 아니니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이미 그는 미얀마인을 쓰는데 전문가가 돼있었다.

"시장바닥같던 총무부가 절간이 되다니" "공장 유리창이 다 어디로 갔지"
(너무 유리가 깨끗해서 없는 줄 알았다는 말)

당시 이곳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말들이다.

공업장관도 직접 와서 보고 미얀마에는 바로 이런 매니지먼트가 필요하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창고를 개조한 허름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수수한 옷에 낡은
차를 타고 다닌다.

미얀마의 보통 사람들에게 이질적인 생활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교외의 그의 목조집 역시 허름하며 미얀마 사람도 어지간하면 다 갖고
있는 위성방송수신시설도 그의 집엔 아예 없다.

골프도 치지 않는다.

요즘 그를 바쁘게 하는 것은 투자컨설팅 요구다.

그는 현지에서 투자자문가로 취급되고 있다.

외국기업, 특히 대기업의 생리를 잘 알고 동시에 미얀마 정부로부터 신망이
높고 현지경제계에도 마당발로 통할 정도로 정통하기 때문이다.

호주의 아시아포커스그룹과 일반협력을 약속했으며 미국자본과 일본자본이
그에게 합작항공회사 설립을 독려하여 현재 타당성 조사팀을 가동중이다.

호주 국영 조지 웨스턴사와 손잡고 합작투자하고 있는 밀가루공장과 그
연관 프로젝트는 현재 미얀마 정부와 최종협상중이다.

그는 한국사람임을 잊지 않고 한국인임을 늘 자랑한다.

이왕이면 한국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싶어하는 그의 당연한 희망은 꼭
실현될 것이다.

조만간 한국기업들도 미얀마에 많이 투자하겠지만 벌써 그 성공은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의 호랑이 김주성사장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