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업계가 의외로 조용하다.

휴가철이 됐는데도 흔한 판촉물 하나 나눠주는 주유소가 없을 정도다.

화려한 몸놀림으로 운전자들을 유혹하던 치어걸들의 모습도 간데없다.

주유소쟁탈전, 브랜드휘발유 출시경쟁, 옥탄가논쟁, 가격인하공방 등으로
일년내내 격전을 치렀던 작년과는 분위기가 천양지차다.

현대정유가 하루 31만배럴로 설비규모를 3배 늘린 지난 5월만해도
정유업계는 또 한차례 파란이 일 것으로 예상했었다.

물량이 쏟아져 나오는 만큼 판로개척을 위한 주유소 쟁탈전이 재연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게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일부 업체에선 대응방안까지 세웠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징후는 보이지 않고있다.

오히려 정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유업체들간 이전투구를 벌이기는 커녕 화해의 악수를 나누고 있는 것.

LG정유와 쌍용정유는 상대방을 대상으로 제기했던 30여건의 가처분 신청을
모두 취소했다.

현대정유는 미륭상사가 유공으로 다시 돌아가는데도 별다른 시비를
걸지않았다.

정유업계가 왜 이렇게 조용할까.

정유업체들간 휴전협정이라도 맺은 것인가.

업계에선 그 이유를 영업실적에서 찾고 있다.

적자폭이 갈수록 커져 판매전에 쏟아부을 실탄이 없다는 것.

유공 LG정유 한화에너지 쌍용정유 현대정유등 정유5사는 지난 94년
정유부문에서 2백37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엔 8백45억원으로 적자폭 커졌다.

사정은 올들어 더욱 나빠지는 추세다.

정유5사중 쌍용을 제외한 4사가 상반기중 정유부문에서 모두 적자는
낸 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적자합계가 무려 1천여억원에 달한다고 정유사의 한 관계자는 말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석유화학 부문에서 적자를 메꿔 "기름전쟁"을 치를
만한 전비가 있었으나 올들어서는 경기침체의 여파로 석유화학 부문도
휘청거리고 있다.

정유업계가 매년 해오던 여름휴가철 사은.판촉행사까지 중단한 것도
이 때문이란 설명이다.

정유업계가 "기름전쟁"을 자제하고 있는 것은 실익없이 주유소업자들의
배만 불려주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란 시각도 있다.

뻔한 시장을 놓고 정유업체끼리 아웅다웅하다보니 별다른 실익도 없이
주유소업자들의 입지만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실제로 기름전쟁을 치르는 동안 정유업체들은 주유소에 각종 지원금을
주고 결제조건도 크게 완화해주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유업체들이 주유소에 빼앗겼던 주도권을 되찾기위해 공동전선을
펴고있는데서도 정유사들의 이같은 판단은 읽을 수있다.

정유업계는 최근 주유소에 대해 일제히 <>제품공급가격인상 <>외상기일
단축 <>대리점 마진인상 회수 <>판촉장려금 지급중단 등을 통보했다.

그러나 정유업계의 기름전쟁이 이대로 끝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정유업계의 생산이 수요를 웃돌고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싸움의 형태는 달라질지 몰라도 정유업체간 판매전은 언젠가는 재연될
것으로 재계는 보고있다.

이와관련해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의 싸움은 일본의 경우처럼
주유소의 사업다각화에 촛점이 맞춰질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의 경우엔 대부분의 업체들이 편의점 소매점을 겸업하는등 주유소의
다각화와 이를 통한 매출증대책을 펴고있다.

일본의 제너럴석유화 에쏘석유는 계열주유소에 편의점 소매점등을
병설하면서 적극적인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자체 상표를 붙인 상품도 개발 판매할 예정이다.

특히 제너럴석유는 야오한그룹과 제휴해 음료와 식품의 수입판매체인망을
계열주유소에 구축하고 있다.

<권영설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