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과 함께 걸어온 길] (3) 전기통신 선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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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
우리나라 전기 통신의 역사는 1885년 한성과 제물포 사이에 처음으로
전신이 개통된 것을 그 기점으로 삼는다.
이는 모스가 전신을 실용화한지 줄잡아 50년만의 일이긴 하지만 당시
동학과 개화, 위정척사 같은 사상의 갈등 속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시설을
수용하여 경제 생활에 변화를 준 최초의 성공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그 뒤 서울과 의주를 잇는 경의전신선을 비롯하여 서울과 부산을 잇는 남로
전신선과 서울과 춘천 원산을 잇는 북로전신선이 잇달아 개통됨으로써 전신
은 우리의 생활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실례로 1887년 한햇동안 관보와 상보를 포함해서 서로 각국의 발신 통수가
5천여건에 이른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신의 개통이 생활에 편익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반면에 여러가지
이유에서 전신이 외세의 침략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체신부가 전기 통신 1백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한국전기통신1백년사"가
그 발행 취지를 우리나라 전기 통신의 변천사를 개관하고 반성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식의 계기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는 것도 바로 이같은 관점
에서이다.
충실한 사료에 입각하여 보기 드물게 잘 짜여진 이 책자는 전기 통신
1백년을 역사적 계기와 기술의 발달을 근거로 하여 5단계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어 적어도 전기통신의 역사를 개관하는 데에는 좋은 사료가 될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정보통신기술 맥락을 그 근원에서부터 되짚어 보자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돌아보았을때 우리는 한가지 큰 아쉬움을 발견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기술의 도입에서 전개, 실용화 과정을 담당한 우리나라의
초창기 선각자들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대체로
철저한 책임의식과 실용화 의지를 갖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그 기술의
습득과 전개과정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점은 정보통신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나름대로 우리나라 전기 통신의 역사를 정리하고 개괄하기
보다는 이미 매겨진 역사의 틀속에서 초창기 선각자들이 어떻게 전기 통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는가 하는 문제에만 주목하여 차근차근 곱씹어볼 생각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전신의 실체를 접한 사람은 김기수이다.
알려진 대로 그는 1876년 일본과 수호 조약을 체결한 뒤에 근대적 의미의
외교 사절로 일본에 파견된 최초의 수신사이다.
김기수는 1876년5월 일본에 건너가 곳곳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하였는데
이 가운데 일본 공무성에서 전신의 실체와 운영 상황을 보고는 크게 감탄
하였다고 한다.
전기통신에 관한 우리나라 사람의 최초 기록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일동기유"는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스 인자전신의 실상을 신문물
가운데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말로만 듣던 전신은 원반 가운데에 바늘이 하나 있고 네
둘레에 글자가 있는데 바늘로 글자를 하나씩 찍으면 그것이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조합되어 상대방에게 그 글자가 찍혀 나온다.
이미 우리나라에 지자전신의 원리가 전래되었지만 믿기지 않는 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처럼 김기수가 전신에 대해 주의 깊은 관찰을 했음
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종에게 올린 복명서에는 전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김기수의 수신사행에는 10명의 당상.당하관원을 포함해서
83명이 수행하였는데 안광묵의 "창 기행" 이외에는 별다른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전신에 관한 정보가 알려진 것은 김기수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일본과 수교 이전에 이미 청나라를 통해 전신에
관한 정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것으로 영국인 홉슨이 쓴 "박물신편"은
전신에 관한 최초의 정보를 담은 대표적인 서적으로 같은 시기에 발행된
다른 책의 전래로 미루어 그 유입 시기를 1850년께로 추측하고 있다.
1책 3집으로 된 "박물신편"은 열과 빛, 물, 전기, 천체, 지구 등을 망라
하여 근대 과학에 대한 폭넓은 해설을 담은 책으로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에 과학 지식을 전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어 일본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1876년에 이 책의 해설 번역본
3종을 발간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그저 "시세를 아는 데에 참고가 되니 널리
읽히게 하자"는 상소를 올리는 데에 그쳤는가 하면 일부 개화파 지식인들
조차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세임을 논하며 일기류 따위에 적고
있었을 뿐이다.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간 김홍집은 외교 현안을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주일 청국 공사 황준헌으로부터 "조선책략"을 증정받는 등 중요한
책자들을 여럿 가지고 들어왔다.
그 중에 하나가 중국인 정관응이 쓴 "역언"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서구의 문물 제도를 백과사전처럼 종합적으로 소개한 책으로 당시
필사본으로 전해져 국가 제도 전반에 신지식을 전파함으로써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한 예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고종이 좋은 의견이 있으면 건의
하라는 교서를 내렸을 때 1백여 건에 달하는 상소가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20여명의 개화 사상가들이 이 "역언"의 내용을 토대로
전신과 우정 등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고 하니 그 위세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그뒤 이 책은 다행스럽게 왕명으로 한글 번역본이 간행되고 원본의 복각본
도 출판되어 우리나라에 서구 문물을 소개한 대표적인 책이 되었다.
1883년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문인 한성순보는 개화기에
세계 정세와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제도에 관한 소개는 물론이고
과학 지식을 보급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신문은 주로 외신이나 외국에서 발표된 논문을 초록하여 게재하였는데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니 "역언"에서 전재된 기사는 한 편도 없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한성순보는 전신에 관한 다양하고 상세한 기사들이 종종 게재
되었다.
한 예로 1883년 12월 21일자에는 전기의 원리와 발전 방법, 전신의 방법,
육해선의 가설 요령, 각국의 현황을 소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미국 영국
일본등 41개 나라의 육지 전선 통계와 각국의 국유 및 민간 회사의 해저
전선 통계까지 싣고 있다.
그러나 이들 통계는 전문가들에 의해 자료로서 축적되고 분석되지 못하고
단순히 외국의 통계 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데에 그치고 말았다.
한편 1881년 통리기무아문이라는 근대 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한
우리나라는 서구 문물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에 문물 시찰단인 신사 유람단을
파견했다.
박정양 홍영식 강문형 등 정부 관리인 12명의 전문 위원과 26명의 수행원
으로 구성된 신사 유람단은 척사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은밀하게
4개월에 걸쳐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귀국 즉시 고종에게 1백책에 달하는 시찰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며
그 가운데 일본의 근대 농법을 소개한 안종수의 "농정신편"은 우리나라의
개화 풍조를 고조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전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긴 했으나 "효용의 오묘"와
"기술의 현오함" 같은 수사로써 전신을 이해하고 소개하는데에 그쳤다는
아쉬움이 있다.
비교적 주목할 만한 것은 1881년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권고에 따라
군 병기 제조와 새로운 과학 기술 습득을 위해 영선사 김윤식의 인솔로
청국에 파견된 38명의 유학생들이다.
이들이 배운 군 병기 기술에는 전기학, 곧 전신 전화가 포함되어 있어
우리나라로서는 처음으로 전기통신 기술을 정식으로 전수받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이들은 실습 과목별로 분산 배치되었는데 그 가운데 상운과 안준 두 사람은
양전기의 원리를 전공하기 위해 남국 전기창에 배속되었고, 조한근도 뒤에
북국 전기창에 이속되어 역시 전기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학생들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다만 상운과 안준 두 사람은 달랐다.
이홍장에게 보고된 이들의 성적표에는 "이 두사람은 열심히 공부하며
모르는 일은 수시로 묻고 이를 기록하여 전신 원리는 어지간히 알게
되었으며 수뢰를 스스로 만들어 시험하는데 하나의 오차도 없다"고 극찬
했다고 한다.
한편 상운은 조기 귀국하여 기술을 전수하고 실용화하는 데에 이바지하라는
이홍장의 뜻에 따라 전신 전화기기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짐작컨대 상운이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기기는 당시의 청과의 관계로
미루어 고종 이하 정부 대관의 관심 아래 실험을 하였을 가능성이 크나
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리고 그 해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으로 이 전화 기기는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 계속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6일자).
우리나라 전기 통신의 역사는 1885년 한성과 제물포 사이에 처음으로
전신이 개통된 것을 그 기점으로 삼는다.
이는 모스가 전신을 실용화한지 줄잡아 50년만의 일이긴 하지만 당시
동학과 개화, 위정척사 같은 사상의 갈등 속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시설을
수용하여 경제 생활에 변화를 준 최초의 성공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그 뒤 서울과 의주를 잇는 경의전신선을 비롯하여 서울과 부산을 잇는 남로
전신선과 서울과 춘천 원산을 잇는 북로전신선이 잇달아 개통됨으로써 전신
은 우리의 생활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실례로 1887년 한햇동안 관보와 상보를 포함해서 서로 각국의 발신 통수가
5천여건에 이른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신의 개통이 생활에 편익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반면에 여러가지
이유에서 전신이 외세의 침략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체신부가 전기 통신 1백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한국전기통신1백년사"가
그 발행 취지를 우리나라 전기 통신의 변천사를 개관하고 반성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식의 계기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는 것도 바로 이같은 관점
에서이다.
충실한 사료에 입각하여 보기 드물게 잘 짜여진 이 책자는 전기 통신
1백년을 역사적 계기와 기술의 발달을 근거로 하여 5단계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어 적어도 전기통신의 역사를 개관하는 데에는 좋은 사료가 될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정보통신기술 맥락을 그 근원에서부터 되짚어 보자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돌아보았을때 우리는 한가지 큰 아쉬움을 발견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기술의 도입에서 전개, 실용화 과정을 담당한 우리나라의
초창기 선각자들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대체로
철저한 책임의식과 실용화 의지를 갖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그 기술의
습득과 전개과정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점은 정보통신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나름대로 우리나라 전기 통신의 역사를 정리하고 개괄하기
보다는 이미 매겨진 역사의 틀속에서 초창기 선각자들이 어떻게 전기 통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는가 하는 문제에만 주목하여 차근차근 곱씹어볼 생각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전신의 실체를 접한 사람은 김기수이다.
알려진 대로 그는 1876년 일본과 수호 조약을 체결한 뒤에 근대적 의미의
외교 사절로 일본에 파견된 최초의 수신사이다.
김기수는 1876년5월 일본에 건너가 곳곳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하였는데
이 가운데 일본 공무성에서 전신의 실체와 운영 상황을 보고는 크게 감탄
하였다고 한다.
전기통신에 관한 우리나라 사람의 최초 기록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일동기유"는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스 인자전신의 실상을 신문물
가운데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말로만 듣던 전신은 원반 가운데에 바늘이 하나 있고 네
둘레에 글자가 있는데 바늘로 글자를 하나씩 찍으면 그것이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조합되어 상대방에게 그 글자가 찍혀 나온다.
이미 우리나라에 지자전신의 원리가 전래되었지만 믿기지 않는 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처럼 김기수가 전신에 대해 주의 깊은 관찰을 했음
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종에게 올린 복명서에는 전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김기수의 수신사행에는 10명의 당상.당하관원을 포함해서
83명이 수행하였는데 안광묵의 "창 기행" 이외에는 별다른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전신에 관한 정보가 알려진 것은 김기수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일본과 수교 이전에 이미 청나라를 통해 전신에
관한 정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것으로 영국인 홉슨이 쓴 "박물신편"은
전신에 관한 최초의 정보를 담은 대표적인 서적으로 같은 시기에 발행된
다른 책의 전래로 미루어 그 유입 시기를 1850년께로 추측하고 있다.
1책 3집으로 된 "박물신편"은 열과 빛, 물, 전기, 천체, 지구 등을 망라
하여 근대 과학에 대한 폭넓은 해설을 담은 책으로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에 과학 지식을 전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어 일본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1876년에 이 책의 해설 번역본
3종을 발간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그저 "시세를 아는 데에 참고가 되니 널리
읽히게 하자"는 상소를 올리는 데에 그쳤는가 하면 일부 개화파 지식인들
조차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세임을 논하며 일기류 따위에 적고
있었을 뿐이다.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간 김홍집은 외교 현안을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주일 청국 공사 황준헌으로부터 "조선책략"을 증정받는 등 중요한
책자들을 여럿 가지고 들어왔다.
그 중에 하나가 중국인 정관응이 쓴 "역언"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서구의 문물 제도를 백과사전처럼 종합적으로 소개한 책으로 당시
필사본으로 전해져 국가 제도 전반에 신지식을 전파함으로써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한 예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고종이 좋은 의견이 있으면 건의
하라는 교서를 내렸을 때 1백여 건에 달하는 상소가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20여명의 개화 사상가들이 이 "역언"의 내용을 토대로
전신과 우정 등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고 하니 그 위세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그뒤 이 책은 다행스럽게 왕명으로 한글 번역본이 간행되고 원본의 복각본
도 출판되어 우리나라에 서구 문물을 소개한 대표적인 책이 되었다.
1883년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문인 한성순보는 개화기에
세계 정세와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제도에 관한 소개는 물론이고
과학 지식을 보급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신문은 주로 외신이나 외국에서 발표된 논문을 초록하여 게재하였는데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니 "역언"에서 전재된 기사는 한 편도 없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한성순보는 전신에 관한 다양하고 상세한 기사들이 종종 게재
되었다.
한 예로 1883년 12월 21일자에는 전기의 원리와 발전 방법, 전신의 방법,
육해선의 가설 요령, 각국의 현황을 소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미국 영국
일본등 41개 나라의 육지 전선 통계와 각국의 국유 및 민간 회사의 해저
전선 통계까지 싣고 있다.
그러나 이들 통계는 전문가들에 의해 자료로서 축적되고 분석되지 못하고
단순히 외국의 통계 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데에 그치고 말았다.
한편 1881년 통리기무아문이라는 근대 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한
우리나라는 서구 문물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에 문물 시찰단인 신사 유람단을
파견했다.
박정양 홍영식 강문형 등 정부 관리인 12명의 전문 위원과 26명의 수행원
으로 구성된 신사 유람단은 척사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은밀하게
4개월에 걸쳐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귀국 즉시 고종에게 1백책에 달하는 시찰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며
그 가운데 일본의 근대 농법을 소개한 안종수의 "농정신편"은 우리나라의
개화 풍조를 고조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전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긴 했으나 "효용의 오묘"와
"기술의 현오함" 같은 수사로써 전신을 이해하고 소개하는데에 그쳤다는
아쉬움이 있다.
비교적 주목할 만한 것은 1881년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권고에 따라
군 병기 제조와 새로운 과학 기술 습득을 위해 영선사 김윤식의 인솔로
청국에 파견된 38명의 유학생들이다.
이들이 배운 군 병기 기술에는 전기학, 곧 전신 전화가 포함되어 있어
우리나라로서는 처음으로 전기통신 기술을 정식으로 전수받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이들은 실습 과목별로 분산 배치되었는데 그 가운데 상운과 안준 두 사람은
양전기의 원리를 전공하기 위해 남국 전기창에 배속되었고, 조한근도 뒤에
북국 전기창에 이속되어 역시 전기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학생들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다만 상운과 안준 두 사람은 달랐다.
이홍장에게 보고된 이들의 성적표에는 "이 두사람은 열심히 공부하며
모르는 일은 수시로 묻고 이를 기록하여 전신 원리는 어지간히 알게
되었으며 수뢰를 스스로 만들어 시험하는데 하나의 오차도 없다"고 극찬
했다고 한다.
한편 상운은 조기 귀국하여 기술을 전수하고 실용화하는 데에 이바지하라는
이홍장의 뜻에 따라 전신 전화기기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짐작컨대 상운이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기기는 당시의 청과의 관계로
미루어 고종 이하 정부 대관의 관심 아래 실험을 하였을 가능성이 크나
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리고 그 해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으로 이 전화 기기는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 계속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