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도자 유고를 맞은 러시아''

러시아 국민들이 사상 처음으로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마당에 서방
언론들로부터 이런 섬뜩한 가상시나리오가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대선 결선 투표는 3일 오전 8시(현지시각) 극동 추코츠카 지역으로
부터 비교적 평온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당선이 유력시되는 옐친후보의 건강문제로 투표결과가 발표되더라도
러시아정국은 계속 짙은 안개를 걷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옐친후보는 선거운동 막판에 갑자기 모든 공식일정을 취소, 공개석상에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중병설을 불러 일으켰다.

상대방 주가노프후보가 의도적으로 디스코장에 나가 춤을 추고 모스크바
시민들과 배구시합을 벌일 때도 옐친후보의 건강상태는 크렘린궁의 높은
벽에 가려져 있었다.

마지막 선거유세조차 직접 대중들 앞에 나타나지 않고 국영TV에 출연해
부자연스런 모습으로 진행했다.

옐친 선거운동본부의 참모들은 중병설을 너도나도 극구 부인했으나 납득할
만한 설명은 거의 없었다.

지난해 이미 두차례의 심장발작으로 러시아정국의 뜨거운 이슈로 부상한
옐친대통령의 건강상태는 이번 선거뿐만 아니라 옐친재집권을 전제로
이후 권력구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런 전망을 뒷받침하듯 옐친대통령스스로 대권승계자를 심심찮게 거론
했다.

그는 지난달 30일 인테르팍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재집권이후에도
체르노미르딘총리를 유임시켜 개혁.개방정책의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이에앞서 1차선거에서 3위 득표한 레베드를 대통령안보당당 보좌관겸
국가안보회의 사무총장으로 영입하면서 마치 차기대통령을 보장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또 결선투표 전날 크렘린의 핵심참모들 사이에서 레베드가 국가서열 2위에
올랐다는 얘기가 공개적으로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런 얘기는 모스크바 증권가에서 파다하게 퍼지고 있는 옐친 사망설과
맞물려 더욱 증폭되어 갔다.

체르미르딘총리와 레베드 안보담당보좌관간 권력다툼의 징후도 여기저기서
엿보인다.

체르노미르딘총리는 이미 대통령으로부터 조각권을 물려 받았다며 교체될
각료들의 명단을 짜기에 분주한 모습이고, 레베드는 옐친체제에 입성한
뒤부터 곧바로 각종 민생및 치안관련 공략을 직접 발표해 벌써부터 전권을
이양받은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레베드는 미리 대중들에게 확실한 이미지를 심고 권력분배과정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겠다는 의도로 2일에는 안보와 내무에 관련된 모든 권한을
쥐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만약 옐친대통령의 건강이 실제로 국정을 수행할 수 없을만큼 악화됐다면
이 사실이 발표되는 시점부터 러시아는 대혼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소비에트공산독제체제의 붕괴후 한번도 최고지도자의 유고를 경험한 적이
없고 아직까지 권력이양과 관련된 정확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
이다.

러시아 헌법은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면 총리가
일부 제한된 권력을 인계받는 대신 3개월내 재선거를 치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따른 세부부속규정을 마련하면서 국가두마와 옐친대통령간에
마찰이 발생, 총리에게 이양된 권한이 어느정도인지 보궐선거를 어떤 방식
으로 실시하는지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상태다.

이런 의미에서 옐친의 건강은 러시아 앞날의 최대변수일 수밖에 없다는게
외교가의 평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