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상과 원앙은 남매지간이긴 하지만 김문상은 대부인 댁에서
물품 구입하는 일을 맡아 분주하고 원앙은 시녀로서 대부인 곁을
떠나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영국부에서는 서로 만나는 경우가
드문 편이었다.

물론 마음을 먹고 찾아가서 만나려고 하면 만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김문상이 부모를 뵈러 가는 귀향길에 여동생 원앙과
동행하고 보니 원앙이 그 동안 몰라 보게 자란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열살 무렵 부모를 떠나 대부인 댁 견습시녀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소녀 티를 벗지 못하고 있던 원앙이 아니던가.

김문상이 수레를 몰 형편은 못 되어 말을 타고 가면서 원앙을 뒤에
태워 자기를 꼭 붙들고 있도록 하였는데,원앙의 젖가슴이 워낙 커서
등 뒤로 그 젖가슴의 감촉이 자주 느껴지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가사 대감이 탐낼 만도 해 하는 생각이 들어 가사 대감의
첩이 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고도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집에 도착하자 귀머거리인 어머니가 달려 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반갑게 남매를 맞아주었다.

원래부터 귀머거리인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는 입모양을 하도 많이 보아서 그런지 단어 한두 마디는 괴성처럼
질러대곤 하였다.

아버지는 소문에 듣던 대로 거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위독한
상태에 있었다.

"아버지 문상이와 원앙이 왔어요!"

김문상이 소리를 쳤으나 아버지는 두 눈을 멀뚱거리다가 온몸을 뒤틀며
기침만 토해낼 뿐이었다.

원앙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남매를 헛간으로 데리고 갔다.

"관!"

어머니가 큰소리로 한마디 뱉었다.

아닌게 아니라 컴컴한 헛간 안쪽에 거친 나무관이 하나 놓여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김문상은 어머니에게 영국부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따로 모아둔 돈을
내놓았다.

원앙도 얼마 되지 않는 돈과 부채 방석 비녀 같은 작은 선물들을
내어 놓았다.

남매가 내어 놓은 돈은 어쩌면 아버지 장례비용으로 쓰일지도 몰랐다.

이틀 후에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상경하는 남매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김문상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머니를 어떻게 모셔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원앙이 가사 대감의 첩이 된다면 어머니를 모시는 문제도 쉽게 해결이
될 것만 같았다.

원앙이 어려운 집안 형편을 직접 목도하였으니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김문상이 원앙에게 가사 대감의 첩이 되는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