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 나라의 높으신 분이 지바이찰을 나서면 그 지방의 공무원들이
때아닌 부산을 떤적이 있었다.

공무원들은 멀쩡한 민가의 담과 울타리에 흰 페인트칠을 하도록 독려하고
길가에 세운 말목에까지 회칠을 했다.

귀한 분을 맞게 되니 그가 시찰할 곳을 깨끗이 단장하려는 뜻은 이해가
되지만, 늘 그러는 것이 아니라 윗분의 행차에 맞춰서 한다는건 아무래도
위정자의 눈을 속이려는 분식일 듯하다.

분식이란 본래 남을 위해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이니 그것만 가지고는
나무랄게 없다.

보기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려고 꾸미는 일은
모든 예술의 근본 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글에도 "선분식인자 고인낙지"(치장을 잘한 자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란 말이 있다.

그러나 치장이 지나치거나 꾸미는 일에 불순한 의도가 섞여있다면 그
분식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겉치레, 즉
"거죽만 발라서 꾸미는 것"이 된다.

앞에서 말한 공무원들의 작태가 그것이다.

이런 분식의 폐해는 오래전부터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저도 모르게
뿌리를 내렸다.

자기의 수입과는 맞지 않는 사치스런 옷을 입고 뽐내는 일이며,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차려 놓고 권하는 낭비성 상차림도 이에 속한다.

이런 과시용 분식(이때는 실속없이 외관만 치레하는 "허식"이 되지만)은
급기야 사치성 과소비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는데, 아무리 우리경제의 규모가
커졌다고 하더라도 이런 폐해를 막지 못한다면 결국은 나라의 재정을
위태롭게 하는 원인이 될 것이다.

요즘은 무역적자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물건을 만들어 내다 파는 것보다 사다 쓰는게 많다면 건전한 무역이라고
할수 없다.

특히 적자의 원인이 원자재나 가지재 수입에 있지 않고 사치성 소비재
물자의 수입에 있다면 그 불균형은 하루 속히 시정돼야 한다.

국제화 세계화의 시대에 수입을 강제로 막을순 없겠지만 외제 승용차
의류 가구 화장품 담배등 불요불급한 소비를 국민 스스로가 자제한다면
무역 불균형을 시정할수 있으리라고 본다.

우리가 전후의 빈곤에서 벗어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이 아직
3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지금은 허황된 분식과 허식으로 낭비할 때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 놓고 더욱 땀흘려 노력할 때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