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아가 보옥에게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여보이고 물러가려 하자
보옥이 평아를 얼른 붙들었다.

"잠깐만 있어봐. 머리에 꽃을 꽂으면 더 멋있겠어"

보옥이 대나무 가위를 들고 쌍란꽃 화분으로 다가가더니 꽃이름 그대로
두개의 꽃이 마주 보고 나란히 피어있는 가지 하나를 잘라서 평아의
귀밑머리에다 꽂아주었다.

상등품 분과 연지를 바른 얼굴이 그 쌍란꽃으로 인하여 더욱 화사해
보였다.

그때 문득 보옥은 평아가 가문은 어느 정도 좋지만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도 없어 혈혈단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 면에서는 대옥과 비슷한 점이 있기도 하였다.

보옥은 평아가 불쌍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여 좀 더 같이
있고 싶었으나 이환의 시녀가 와서 평아를 도향촌으로 데려갔다.

보옥은 평아의 향기와 잔영이 남아있는 방안을 왔다 갔다하며
서성거리다가 침대에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웠다.

모처럼 남을 위로해 주는 좋은 일을 하고 나니 기분이 상큼해졌다.

보옥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습인의 방으로 가보았다.

습인은 보이지 않고 평아가 두고 간 옷과 손수건이 한켠에 놓여
있었다.

평아의 옷은 물이 뿜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다리미로 다릴 모양이었다.

보옥은 습인이 오기 전에 자기가 다리미를 들고 와서 평아의 옷을
다려놓았다.

그리고 눈물 자국이 묻은 손수건도 대야에 물을 받아 깨끗하게 빨아서
빨랫줄에 걸어두었다.

그렇게 평아를 위해 수고를 하고 나자 더욱 마음이 달콤해졌다.

사랑하는 주인을 섬기는 시녀의 마음이 이런 것인가.

보옥은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닫는 기분이었다.

그날밤 평아는 도향촌에서 자고 희봉은 대부인의 처소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가련의 어머니 형부인이 가련을 데리고 대부인의 처소로
왔다.

가련이 대부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냐?"

대부인이 가련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차갑게 물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시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술에다 핑계를 대는구나.

이놈아, 언제까지 그렇게 망종 노릇을 할 텐가.

희봉이 어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더라.

이 할미가 아니었더라면 희봉이 어제 네놈 손에 죽을 뻔했어.

생각만해도 아찔하구나"

"정말 잘못하였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나한테 그렇게 싹싹 빌 것 없다.

네 마누라에게 빌어야지.

세상에 둘도 없는 미인인 마누라를 두고 다른 년을 끌어들여 재미를
보려하다니. 쯔쯔, 한심하구나"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