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엔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한 기업인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문체부가 6월의 문화인물로 유일한을 선정한 것은 그야말로
"기업이윤의 사회환원"과 "소유와 경영의 분리"등 한국기업의 이정표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유일한은 1895년 평양에서 8남매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기연은 일찍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당시에 이미 재봉틀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유기연은 한일합병이 되자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재정적 후원을 맡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개화독립론에 영향을 받아 1904년에 아홉살밖에 되지 않는 유일한을
귀국하는 미국 선교사 편에 유학을 보낸다.

미국에 건너간 그는 선교사의 연고지인 네브래스카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학으로 미시간대학 캘리포니아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스탠퍼드 대학원
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가 대학 재학중에 일어난 3.1운동이 그의 생애를 결정짓는 중요 계기가
된다.

유일한은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를 이승만
서재필 조병옥 임병직 등과 함께 주도하고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을 낭독한다.

학업을 마친 그는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너럴 일렉트릭(GE)에
입사했으나 얼마 후 그만 둔다.

그는 1922년 친구 월레스 스미드와 라초이(숙주나물)식품회사를 창립해서
25년까지 50여만달러를 번다.

그러나 유일한은 중국계 부인 호미리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회사를 정리하고 영구 귀국한다.

그는 26년 서울종로2가에 유한양행이라는 제약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는 회사운영에 몇가지 경영원칙을 세워 관철시켰다.

그중의 하나가 "기업이란 나라와 민족의 것이고 국민의 소유"라는 생각
이다.

이 원칙은 철저한 자진납세, 국가정책에 대한 적극협조로 구체화됐고
소유.경영의 분리와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란 선구적 행동을 낳게 했다.

또 회사공개와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했고 69년 사장직을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조권순에게 물려주고 일선서 은퇴했다.

그후 그는 전재산을 유한재단에 기증하고 71년 3월에 76세로 별세했다.

반면에 유일한의 외부자본을 도입하지 않는 자기자본 경영원칙과
정치권과의 제휴거부 등은 기업 성장에 한계를 갖게 했다는 평가도 없지
않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