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통신업계에 ''합종연횡''의 회오리가 거세게 몰아닥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10년안에 몇몇 거대 통신사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전망
마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세계 통신업계가 살아남기 위해 합병과 제휴 등을 통한 판 새로짜기 경쟁에
휘말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전화업체들이 잇따라 대규모 합병을 단행, 몸집불리기에 나서고
있다.

차세대사업으로 꼽히는 개인휴대통신(PCS)사업을 따내기 위한 각축전도
불꽃을 튀기고 있다.

유럽에서도 통신업체들이 해외시장 진출을 꾀하고 있다.

경쟁업체들과의 합병으로 미국과 유럽지역 통신시장 재편에 기름을 붓고
있다.

이같은 통신업계의 합종연횡은 통신시장의 개방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지난 2월 통신시장간 자유진입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통신개혁법을
마련, 시행중이다.

이 조치로 통신업체들이 덩치를 키우는데 장애로 작용했던 요인들이
사라지면서 통신업체들간 합병이 촉발됐다.

유럽에서도 오는 98년 통신자유화를 앞두고 통신업체들의 시장확대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회사의 규모를 늘리거나 새로운 시장에 참여하는등 변화하지 않으면 경쟁
에서 살아남기 힘들게 됐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지난 4월1일 발표된 미국 지역통신회사
SBC커뮤니케이션과 퍼시픽 텔레시스의 합병.

두회사의 주식 총액이 441억달러(싯가기준)로 미기업인수합병(M&A) 사상
최대규모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초고속으로 합병에 성공한 것도 뜻밖이었다.

두 회사는 통신개혁법이 의회를 통과한지 두달만에, 그리고 협상시작
20여일만에 합병을 성사시킨 것이다.

지난 84년 AT&T가 지역전화사업을 자본관계가 없는 7개의 별도회사(통칭
베이비 벨)로 분리독립시킨후 미 통신업계가 얼마나 간절히 거대화를 추진해
왔는가를 알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시장이 탄탄한 캘리포니아주를 기반으로 하는 퍼시픽텔레시스와 휴대전화
시장에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SBC가 합침으로써 서로의 강점을 살려
AT&T나 MCI등 대형전화회사와 경쟁할수 있다는 점이 이들을 합병으로 이끈
요인이다.

그동안 베이비 벨들은 지역독점이란 혜택을 누리는 대신 다른회사들과는
합병을 할수 없었다.

때문에 미국 통신업계가 SBC와 퍼시픽 텔레시스간 합병을 미 통신시장에서
AT&T와 베이비 벨들의 분할독점체제가 끝났다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난 4월22일에는 지역전화서비스업체인 벨
애틀랜틱과 나이넥스가 520억달러(주가기준)규모의 합병에 합의했다.

근접한 지역에서 지역전화사업을 하고 있는 이들은 합병을 통해 보다
효율적인 장거리전화사업을 운영할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특히 나이넥스는 영국 케이블TV 사업자인 나이넥스 케이블콤스사의 대주주
로 이미 전화사업은 물론 오락프로그램을 제공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유럽과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연결하는 "플랙" 광케이블연결 프로젝트
에도 참가하고 있다.

따라서 벨 애틀랜틱이 향후 국제적인 영업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5월들어서는 벨사우스가 이미 합병키로한 퍼시픽 텔레시스.SBC연합과
장거리전화사업을 함께 하기로 제휴했다.

이들 세 회사가 연합할 경우 장거리전화시 지역전화회사에 지불하는 접속
요금을 제외하더라도 연간 183억달러에 이르는 장거리전화시장의 40%를
점유할수 있을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합병을 통한 베이비벨의 도전에 대해 장거리전화회사들은 대량감원이나
기업분할등의 다운사이징(감량경영)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AT&T가 지난해 9월 통신과 통신장비, 컴퓨터등 3개업체를 분리하겠다고
선언한데 이어 올해부터 3년내에 전체직원의 13%인 4만명을 감원할 방침
이다.

지난해에 이미 3,000명을 해고한데 이어 올들어서도 감량경영을 위한
인원감축폭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변화의 물결이 미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수평적 결합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경쟁을 이겨나가기 위해 국제전화나 이동통신까지 업무영역을 확대하는가
하면 국경과 바다를 건너 제휴하려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비록 합병이 결렬되기는 했지만 영국 브리티시 텔레콤(BT)과 케이블&와이어
리스(C&W)간 협상은 최초로 전세계를 무대로 한 통신회사를 탄생시킬
뻔했었다.

BT는 유럽지역에 강력한 사업기반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 장거리
전화회사인 MCI의 지분 20%를 확보, 북미시장에도 교두보를 구축하고 있다.

또 C&W는 홍콩 텔레콤의 대주주로 향후 거대한 중국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는등 아시아지역에 튼튼한 사업기반을 갖고 있다.

따라서 양사가 합병할 경우 북미와 중국의 통신시장을 공략하는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98년 유럽통신시장개방을 앞두고 독일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유럽최대 통신시장을 갖고있는 독일의 국영 도이치 텔레콤(DT)은 ISDN
(종합정보통신망)을 축으로 국내의 네트워크기반구축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세계적인 전화회사로의 도약을 목표로 해외시장진출에도 여념이 없다.

DT의 론 좀머사장은 시장개방으로 치열해질 경쟁체제에 대비, 96년을
멀티미디어시장에 본격 진입하는 해로 선포했다.

DT의 해외시장진출계획에는 통신자유화로 잃게될지 모를 시장점유율을
해외사업에서 보충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할수 있다.

DT는 이를위해 프랑스텔레콤, 미 스프린트등과 함께 "글로벌 원"을 설립,
지난 1월말부터 사업을 개시했다.

독일에서는 또 통신자유화에 앞서 제2통신사업자가 탄생할 전망이다.

현재 외국 통신업체를 포함해 10개가 넘는 기업과 그룹이 참여의사를
표명, 업무제휴를 추진중이다.

철강업체인 만네스만과 기계업체인 훼바는 지난 1월 전국적인 규모의
통신네트워크를 구축키로 제휴했다.

이와함께 BT, 대기업그룹인 피악, 전력회사인 RWE와도 통신서비스를 제공
키로 제휴했다.

바다를 넘은 제휴로는 최근 영국의 BT와 미국의 AT&T간 제휴를 꼽을수
있다.

각각 세계 2위와 5위의 통신업체인 이들이 런던에 전자통신망을 건설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을 통신업계에서는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밖에 미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지난 5월6일 마감한 PCS사업 3차 주파수
경매에서도 이변이 벌어졌다.

PCS사업에 대한 기업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 259개사가 경매물건인 493개
사업권을 102억달러에 낙찰받음으로써 낙찰금액이 당초 예상됐던 50억달러
수준을 훨씬 웃돌았던 것이다.

미 통신업체들사이에는 PCS사업의 전망이 불투명하긴하나 신규사업에
참여치 않으면 낙오한다는 위기감 때문에 우선 주파수를 많이 따내고 보자는
심리가 팽배해 있다.

이업종간 제휴도 통신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하나로 꼽힌다.

미 지역전화회사인 US웨스트가 케이블TV회사인 타임워너및 컨티넨탈
케이블비전과 제휴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업계에서는 합병 제휴추세가 가속화될 경우 과거에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일들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통신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같은 합종연횡과 이합집산현상에
대해 기존 시장구조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의 저항도 만만찮다.

지역전화회사들간 합병이 경쟁을 해치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독점적
가격체제가 형성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 소비자연맹의 통신정책이사인 브래들리 스틸맨씨는 이같은 합병러시가
"지금까지는 볼수 없었던 반경쟁적인 행위의 다른 변형"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다.

합병당사자들은 이같은 지적을 의식, 합병후에도 각자 독자적인 경쟁체제를
유지해갈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아무튼 통신업계에 나타나고 있는 이같은 거대한 변화는 그동안 여러 규제
및 기술적 제약 때문에 묶여있던 사업영역의 경계선을 허물어뜨리면서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통신업계의 전문가들은 통신산업개방으로 세계통신산업의 판도에 지각변동
이 일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기존서비스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고 규모의 경제를 누리기 위해서는
기업간 합병.제휴를 통한 새판짜기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 이창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