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이 욕실에서 목욕을 끝내고 부채를 부쳐가며 방으로 들어서다가
청문이 보옥 앞에서 부채를 찢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하였다.

"청문이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부채를 갈갈이 찢다니"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옥이 사월에게로 다가가더니 목욕을 막
끝낸 사월의 살냄새를 맡으려는 듯 코를 킁킁거리다가 사월이 들고 있는
부채를 와락 빼앗아 청문에게 던져주었다.

"청문아, 이것도 찢어라"

청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월의 부채를 쫙쫙 찢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왜 남의 부채를 찢는 거야?"

사월이 도끼눈을 하고 대들자 보옥이 건들건들 몸을 흔들며 자기
방 쪽을 가리켰다.

"내 방 부채함 속에서 사월이 너 갖고 싶은 부채 얼마든지 골라
가져. 그까짓 부채 하나 가지고"

"그까짓 부채 하나라니요? 그럼 아예 청문이에게 부채함을 안겨줘서
부채를 다 찢도록 하세요.

같이 앉아서 찢으시든지"

사월이 입을 비죽이며 빈정거렸다.

"좋아. 그럼 너, 부채함을 들고 와"

"내가 왜 들고 와요.

청문이더러 들고 오라고 하세요"

그리하여 청문이 부채함을 들고 오고 보옥과 청문은 갖가지 부채들을
찢으며 킬킬거렸다.

보옥은 부채들을 찢다가 술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스르르 방바닥에
몸을 뉘었다.

다음날, 상운이 시녀들을 데리고 영국부로 놀러와 대부인과 집안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린 후 보옥이 있는 이홍원을 들렀다.

대옥은 상운이 보옥에게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이 뒤숭숭하여 혼자서 이홍원으로 와보았다.

보채와 보옥 두 사람이 너무 친해지지 않나 신경을 쓰기도 벅찬데
상운마저 보옥에게 들락거리니 대옥으로서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대옥이 이홍원으로 들어와서 보옥의 방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여
보았다.

마침 보옥과 상운은 과거시험을 화제로 말들을 주고 받고 있었다.

상운은 보옥에게 남자로서 과거시험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보옥은
과거 따위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대꾸하였다.

그러다가 보옥이 상운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대옥 누이라면 그런 시시한 소리는 하지 않을 거야"

그 말은 보옥이 상운보다는 대옥을 높이 쳐준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대옥은 보옥과 상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심이 일시에 사라지고
마음이 행복감으로 차오르면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