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식품업체인 P사가 어음을 발행하는 날이면 이 회사엔 장사진을
이룬다.

하청업체나 납품업체들만 모이는게 아니다.

대형은행에서부터 투금 신용금고에 이르기까지 금융기관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다.

금융기관사람들이 직접적인 거래관계도 없는 P사에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음을 수령한 업체들에게 즉석에서 어음할인(대출)을 해주기 위해서다.

요즘처럼 돈이 남아돌고 중소기업부도가 성행하는 시기엔 P사만한 매력을
가진 거래처도 없다는게 은행자금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어떡하든 돈을 운용해야하는 상황이다.

대기업은 은행을 떠나고 있다.

그나마 은행돈을 쓰려는 대기업들은 "금리할인"을 공공연히 요구한다.

그렇다고 아무 중소기업들에게 무턱대고 돈을 빌려줄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소기업=부도"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을 정도로 중소기업부도가 줄을
잇고 있어서다.

자칫하면 부실여신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십상이다.

따라서 "중소기업을 발굴하되 대출금을 떼이지 않을 중소기업을 유치하는게
중요해졌다" (허홍 대동은행장).

신용리스크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회피(헷지)하면서 대출의 양적확대를
꾀할수 있느냐가 저금리시대의 뉴파이낸스로 등장한 것이다.

은행등 금융기관들이 중소기업을 발굴하는 한편 신용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는 두가지다.

하나는 과학적인 심사기법의 개발이고 다른 하나는 심사전문가의 양성이다.

과학적인 심사기법개발은 신용도평가모델과 기업건전도 측정모델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신용도평가모델개발이 돈을 떼이지 않을 기업을 발굴하는데 촛점을 맞춘
것이라면 기업건전도 측정모델은 기존 대출금을 떼이지 않는데 촛점이
맞춰져 있다.

지난해 한국신용정보와 손잡고 두가지 모델을 함께 개발, 이미 실행단계에
들어선 외환은행이 대표적이다.

조흥은행과 기업은행도 "부실조기경보시스템"을 가동중이다.

심사전문가양성은 다소 공격적인 후발은행에서 두드러진다.

장기신용은행은 심사부에 공대출신을 대거 채용하고 있다.

한미은행은 창립때부터 본점은 물론 각 영업점에 전문심사역을 두고 있다.

어떤 여신이라도 이들의 "허락"없이는 나갈수 없다.

보람은행은 아예 모든 조직을 RM(기업고객전담역)과 PB(개인고객전담역)로
나눴다.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만이 신용리스크를 최소화할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외환은행의 영업점장회의엔 다른 은행에는 없는 순서가 하나 있다.

"중소기업 발굴현황보고"다.

그때까지 신규 중소기업을 몇개나 발굴했는지를 보고하는 자리다.

중소기업발굴실적이 부진한 영업점장들로선 가시방석일수 밖에 없다.

외환은행은 이런 노력덕분에 올들어 무려 6백여개의 중소기업을 신규
발굴했다.

연말까지는 2천개 중소기업을 유치, 1조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다른 은행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신용리스크 헷지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다면
은행도 함께 도산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
(이정조 향영리스크대표)는게 전문가들의 경고다.

<하영춘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