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DVERTISEMENT

    [여성칼럼] 빈 수레 .. 김도희 <실내디자이너>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지난 겨울 폭설로 길이 막혀 두문불출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개울
    건너 밭 이랑엔 어느덧 보리가 푸릇푸릇하다.

    먼 산에 잔설을 이고서도 봄은 이렇게 와 있다.

    이처럼 단순한 자연의 순환법칙에 마음을 기울이노라면 늘 분주한
    도시의 일상이 우리의 심성을 얼마나 메마르게 하는지 알 수 있다.

    이름없이 피고 지는 소박한 들꽃이나 나지막이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친숙하게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 날로 더해가는 것은 사는 일에 골몰했던
    영혼이 지쳐 있다는 징후이자 어느새 인생을 되돌아볼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할 터이다.

    찬란하리라 믿었던 젊은날의 환상들을 깨뜨리면서 반생을 훌쩍
    넘기고 나니 문득 쓸모없는 짐만 잔뜩 싣고 달려온 것이 아닌가
    싶다.

    부질없는 욕심과 오만을 버리리라,지성으로 무장된 위선과 허영심도
    버리리라, 용서와 화해를 모르던 옹색한 자존심도 버리리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삐걱이는 수레를 멈추지 못하던 어리석음으로부터
    이젠 정말 벗어나고 싶다.

    빈 차로 떠나는 마지막 서울행 버스가 어둠속 산마루를 조심스레
    내려간다.

    저 구비진 바람부는 신작로.어쩌면 그 길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고단한
    인생사의 노정인 듯싶다.

    삐걱이는 삶의 수레를 세워놓고 잠시 쉬었다 가면 어떨까.

    안간힘을 쓰며 지켜오던 모든 짐들을 버릴 수만 있다면 다 버리고
    덜컹거리는 빈 수레로 인생의 마지막 언덕을 천천히 음미하며 내려갔으면
    한다.

    얼마전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계신 화가 한분의 문병을 갔다.

    왕성한 의욕으로 늘 건강하리라던 그분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채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모두 맞이하게 될 삶의 끝자락을 보는 듯
    아득해지던 허무감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원숙한 정신의 소유자인 노화가는 담담하고 고요한 얼굴로
    상심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일생동안 요즘처럼 홀가분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산 적이 없다.

    우스운 것은 내 육신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고서야 비로소
    그 많은 책임과 의무로부터 놓여났다는 것이다.

    훌륭한 가장으로 도덕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늘 좋은 작품을
    그리는 화가가 돼야 한다는 정신적 부담.

    그 모두가 내게는 부채였고 멍에였다.

    아쉬운 것은 건강과 시간이 허락할 때 그 모든 것이 스스로 선택한
    욕망의 굴레였음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험과 도전으로 드라마틱한 한 평생을 후회없이 살았으리라 여겨지던
    어른이었음에도 병상에 누워 뒤돌아본 지난날은 고통스럽고 외로운
    행로였다는 것이다.

    결국 한 발짝만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이해관계에 얽혀 다투고 시기하고
    누군가를 비방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에 다름 아니다.

    돌이켜보면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야 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정치현실 또한 가슴 아프다.

    나아가 냉혹함과 비정함 속에서 막바지엔 서로 상대후보와 정당을
    비방하고 헐뜯으며 치러진 이번 선거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런 풍토속에서 과연 누가 겸양의 덕과 도덕성을 갖춘 선량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로 소신없는 한표를 던진 일 또한 돌이켜보면
    우울하기 짝이 없다.

    창밖에는 버려야 할 때 버릴 줄 알고 때가 오면 다시 싹을 피우는
    나무들이 순진한 자세로 봄을 맞고 있다.

    우리의 삶도 저 소박한 자연의 심성을 닮아가기를 꿈꿔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1일자).

    ADVERTISEMENT

    1. 1

      [기고] 피지컬 AI, 대한민국 AI 전략의 돌파구

      피지컬 인공지능(AI)은 실제 공간에서 감지하고 움직이고 조작하며 상황에 맞게 스스로 행동을 바꾸는 ‘움직이는 인공지능’이다. 디지털 세계에 머무는 지능이 아니라 센서·로봇·장비와 결합해 물리적 세계를 직접 바꾸는 지능이라는 점에서 기존 대규모언어모델(LLM) 기반 AI와 출발점이 다르다.LLM과 같은 소프트웨어 중심 AI는 클라우드와 그래픽처리장치(GPU) 인프라, 소수의 글로벌 플랫폼 기업에 성능과 수익이 집중되기 쉬워 승자독식 구조를 강화한다. 이에 비해 피지컬 AI는 센서, 전자부품, 통신장비, 산업용 네트워크, 로봇, 자동화 설비, 공장 제어 시스템 등 광범위한 하드웨어 생태계가 함께 발전해야만 구현할 수 있다. 부품·장비·제조·서비스 전반에 걸쳐 투자와 일자리를 분산시키고, 공급망 전체의 기술·인력·인프라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어 국가 산업 정책 차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한국은 피지컬 AI 전환에서 강점이 더 많은 국가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정밀기계, 조선·플랜트, 자동차·부품 등 다양한 제조업 저변을 이미 갖추고 있다. 이들 산업은 모두 센서, 제어, 로봇, 자동화 설비와 높은 결합도를 지닌다. 피지컬 AI의 파급력은 제조와 자동차에만 머물지 않는다. 물류 창고의 자율주행 로봇, 병원의 수술·재활·간호 지원 로봇, 고령화 사회의 돌봄 로봇, 스마트빌딩·스마트시티 인프라, 국방·재난 대응 로봇까지 물리적 세계에서 움직이는 거의 모든 시스템이 피지컬 AI의 잠재적 수요처다.문제는 방향은 보이는데, 누가 어떻게 판을 짜느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피지컬 AI는 개별 기업이 각각

    2. 2

      [한경에세이] 작은 손길 모여 더 따뜻한 도시

      자원봉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내 아내다. 아내는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로 만난 뒤 지금까지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조용한 성격이다. 하지만 동네 어르신 도시락을 나르고 말벗 봉사를 하며 도서관 명예사서로 활동하는 모습만큼은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조용한데 강한 사람’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어느 날은 늦은 저녁 퇴근해 집에 오니 아내가 없었다.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이렇게 시간이 늦은 줄 몰랐네” 하며 아내가 들어왔다. 어르신 도시락을 배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 순간 ‘봉사는 결국 이런 자연스러운 표정에서 시작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구청장이 되고 난 뒤 행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 깊이 체감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마을의 온기, 공동체의 결속은 결국 서로를 향한 작은 마음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나는 자원봉사를 더 넓히고,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아왔다.자원봉사센터를 사단법인으로 전환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민간이 중심이 돼 기업과 주민이 함께 힘을 모으자 봉사는 더욱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확장됐다. 그 흐름은 국경도 넘었다. 자매도시인 몽골 사막화 지역에 ‘성동 숲’을 조성하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2000그루의 나무를 심던 날, 한 봉사자가 “청장님, 우리는 지금 지구의 미래를 심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2022년 울진·삼척 산불,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올해 의성·하동 산불 피해와 홍성 수해까지, 국내외 재난 현장

    3. 3

      [백광엽 칼럼] 기업 유보금 80조 '증시 살포 유도법'

      승자 독식의 인공지능(AI)·반도체 패권 전쟁은 ‘쩐의 전쟁’으로 감각된다. 투자 단위 자체가 다르다. 수십조, 수백조는 기본이고 수천조원 베팅까지 거론된다. 맨 앞줄에 미국이 달린다. 오픈AI가 주도하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만 450조원, 구글·메타 등 빅테크의 데이터센터 건설에는 최소 7000조원(약 5조달러)이 투입된다. 정부 주도로 미래산업에 올인 중인 중국은 올 R&D 예산이 800조원이다. 대만 TSMC도 미 반도체 팹 건설에만 220조원을 들이붓는다.한국은 가랑이가 찢어질 판이다. 150조원짜리 거대 ‘국민성장펀드’를 지난주 호기롭게 출범시켰지만 가슴 졸이는 올인 베팅에 가깝다. 산업은행이 무려 75조원의 첨단기금채권을 찍고 5대 은행이 10조원씩 갹출해야 겨우 자금이 충당된다. 투자 손실은 은행권이 우선 떠안는 구조여서 혹여 방향 착오가 생기면 시스템 위기로 번질 수 있다.쩐의 전쟁 와중에 자칫 민간 투자 재원을 말려버릴 자충수 입법이 초읽기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상법 개정 얘기다. ‘소각만으로 코스피가 40%는 뛸 것’(강성부 KCGI 대표)이라는 설익은 ‘썰’이 등장한 지 2년여 만의 초고속 입법이다. 기세 오른 토종 행동주의와 포퓰리즘 정치의 잘못된 만남의 결과다.상장사 자사주는 어림잡아 80조원 규모다. 10곳 중 7곳꼴로 보유 중인 상황에서 소각 의무화는 기업 현금의 증시 공중 살포 명령과 다를 바 없다. 자사주 보유 상장사의 절대다수(89%)인 중소·중견기업엔 국가 폭력으로 감지될 것이다. 국민성장펀드에 배정된 50조원의 초저리대출을 타내려고 벌써 긴 줄이 늘어선 마당에 이런 역주행이 없다.감자 비율만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