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그룹 기조실장들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비자금사건"이후 공개석상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기조실장들이
총선이 끝나면서 전면에 나서 정부관계자들을 만나 정부정책에 대한
기업의 입장을 전달하는등 행보를 빨리하고 있는 것.

기조실장들은 당장 24일 전경련에서 회동,자본재 국산화방안등을
논의한다.

30대그룹 기조실장들이 모두 참가하는 정례적인 모임이긴 하나 올들어
처음 만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는 29일에는 박세용현대 현명관삼성 이문호LG 박용근대우 손길승
선경그룹 기조실장등 5대그룹 기조실장은 구본영청와대경제수석과 만나
총선이후의 경제현안 해결방안을 협의할 예정이다.

경제수석이 회장단회의에 참석한 적은 있어도 기조실장들과 만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기조실장들이 이에앞서 25일에는 김인호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과 만나
공정거래 풍토 조성방안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키로 했다.

S그룹관계자는 "기조실장과 정부고위관계자들간 잇단 회동은 총수의
측근이자 그룹의 경영을 가장 잘 아는 기조실장에게 무게를 실어주어
전문경영인들의 위상을 높혀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으나 기조실장들
스스로로 행동반경을 넓히려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기조실장들의 발빠른 움직임은 비단 정부관계자들과의 만남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룹의 업무를 챙기는데서도 그들의 행동반경은 이전에 비해 훨씬
넓어졌다.

박세용현대그룹종기실장의 경우 종기실장외에 종합상사사장 상선사장등
"1인3역"을 하고 있다.

오전 7시께 계동사옥에 출근하는 박사장은 곧바로 계열사별 업무진행
상황을 파악, 10층에 있는 정몽구그룹회장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종기실 각팀 회의를 주재하느라 "몸이 열개라도 부족한 실정"
이라고 말한다.

특히 박사장은 정회장의 공격경영을 무리없이 보필하면서도 투명경영을
위해 재계처음으로 사외이사제를 도입할 것을 건의하는등 그룹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있다고 그룹관계자는 전한다.

현명관비서실장도 이건희회장을 그림자처럼 보필하면서 그룹 주요경영을
무리없이 챙겨 이회장의 신임을 얻고있다.

특히 그룹이 사활을 걸고 추진중인 개인휴대통신(PCS)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적(현대)과의 동침"을 주도했으며현재도 그룹의 PCS사업단장을
맡고 있다.

선경 쌍용 한진 동부 동양등의 경우도 그룹의 중점추진사업인 통신
유통 민자SOC건설 공기업민영화건 등은 대부분 기조실장에게 맡기고 있다.

기조실장이라는 자리는 21세기 전략을 짜는 "작전참모장"이자 "총수의
오른팔".

그런 점에서 보면 기조실장들이 전면에 나서서 지휘하는 것은 색다를게
별로 없다.

하지만 기조실장들은 그동안 전면에 나서지않고 뒤에서 총수를 보필하는데
머물렀던 것도 사실이다.

문민정부 초기에 전문경영인 육성을 위해 30대그룹 기조실장회의가
활성화되면서 이들의 운신폭이 한 때 넓었으나 비자금 사건등의 여파로
정부와 관계가 불편해지자 다시금 행동반경을 좁혔었다.

그러면 기조실장들이 최근들어 전에없이 행동반경을 넓히고 있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우선은 21세기 재계판도에 영향을 줄 통신사업자 선정을 비롯 한국중공업
등 공기업 민영화,사회간접자본(SOC) 민자참여등 대형사업들이 재계무대에
즐비하게 "올려지면서" 그룹업무를 기획하고 조정하는 그들의 위상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물론 비자금사건이후 총수들의 운신폭이 좁아져 상대적으로 기조실장들이
부각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전문경영인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추세여서 대표주자인
기조실장들의 움직임은 빨라질 수밖에 없다는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기조실장들의 시대가 다시금 활짝 열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 이의춘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