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방배동에 사는 김미연씨(26)는 지난해말 "지옥"같은 회사를 나와
버렸다.

김씨에겐 실제로 1년 남짓 다녔던 직장 생활이 기억하기 조차 싫은 악몽
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녀에게 회사가 일터가 아니라
지옥으로 느껴졌던 것은 같은 부서의 남자대리 A씨(34)가 추근거리면서부터.

유부남인 A대리는 입사초기 업무를 가르쳐 준다며 불필요하게 어깨에 손을
얹거나 허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불쾌했지만 친밀감의 표현이려니 하며 꾹 참았다.

그러나 점점 신체접촉이 잦아졌고 주변에 동료들이 없을 땐 듣기 민망한
음담패설까지 입에 담았다.

안되겠다 싶어 가능한 한 A대리를 피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노골적으로
성희롱을 가해왔다.

구내전화를 걸어 킥킥대며 속옷 색깔을 묻기까지 했다.

너무나 창피하고 겁도 나 김씨는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고 혼자 고민에
빠졌다.

회사 출근하는게 점점 무서워지고 일마저 흥미를 잃게 된 김씨는 결국
사표를 내고 말았다.

여성들에 대한 직장내 성희롱은 명백한 성차별이다.

성희롱 자체가 여성을 직장동료나 부하직원으로 보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
보는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특히 성희롱은 여성들에게 직장을 일터가 아니라 "도망치고 싶은 곳"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여성들의 근로환경을 악화시키는 독버섯 같은게 바로 직장내 성희롱이란
얘기다.

직장내 성희롱을 단지 남녀간의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고용상의 성차별
문제로 심각히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직장내 성희롱은 의외로 만연돼 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전국의 직장여성 45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결과는
그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조사에서 성적 농담이나 불쾌한 신체접촉등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여성은 조사대상의 87%에 달했다.

직장여성 10명중 9명이 어떤 형태로든 성희롱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가장 빈번히 당한 성희롱(복수응답)으로는 음담패설등 성적농담이 71.4%로
가장 많았다.

다음은 불필요한 신체접촉(56.4%) 외모에 대한 성적비유나 평가(44.4%)
술좌석에서의 희롱(42.2%) 음란한 눈빛으로 쳐다보기(39.8%) 생리휴가에
대한 불쾌한 표현(36.9%)등이 지적됐다.

성희롱 가해자는 직속상사가 38.9%로 제일 많았고 동료 남자직원(37.7%)
다른부서 상사(13.7%) 고객(3.3%)등의 순이었다.

직장내 성희롱이 이처럼 "일반화"돼 있지만 문제는 이를 근절할 수 있는
뾰족한 방도가 없다는데 있다.

무엇보다 직장내 성희롱을 처벌할 법적 장치가 없다.

물론 성폭력 특별법에선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적 추행"을 2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이 법은 직장내 성희롱의 범위를 "추행"에만 한정하고 있을 뿐이다.

"성희롱(Sexual Harassment)은 언어희롱에서부터 강간에 이르기까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성을 매개로 행해지는 모든 언어적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포함한다.

사소한 성적 농담이더라도 듣는 여성이 "원하지 않는다"거나 "일방통행"일
경우 성희롱이 된다.

이로 인한 고용상의 불이익은 물론 정신적인 피해까지도 성희롱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현행 성폭력 특별법으로 다스릴 수 있는 직장내 성희롱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이수연 민우회 사무직여성부 간사)

남성중심의 직장 문화 역시 성희롱을 용인케 하는 주범으로 꼽힌다.

"남성 위주의 한국사회에서 성에 대한 남성들의 언동은 관대하게 받아
들여지기 일쑤다.

사무실 안에서 여직원들에게 툭툭 던지는 음담패설을 "직장생활의 윤활유"
나 "스트레스 해소수단"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남자들이 많다.

더 심각한 건 이런 걸 문제삼는 여성이 오히려 "이상한 여자" 소리를
듣는다는 점이다"(G기업 총무과 L씨, 24세 여성).

이 때문에 성희롱 피해를 회사측에 호소하거나 소송을 제기한 일부 여성들
이 구제를 받기 보다는 정신적 고통이나 실직등 더 큰 피해를 입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대표적인 게 작년 7월 항소심까지 가는 우여곡절 끝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서울대 우조교 사건"이다.

그래서 여성단체들은 직장내 성희롱을 뿌리 뽑을 수 있는 확실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해여성의 시각에서 본 포괄적인 성희롱에 대해 가해자는 물론 고용주나
국가도 책임을 지도록 남녀고용평등법에 처벌규정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기업들도 직장내 성희롱을 예방하고 규제할 수 있는 명확한 인사정책
과 예방지침을 사원들에게 주지시켜야 한다.

성희롱 피해로 인해 여성들이 직장을 떠나거나 근무의욕을 상실한다면
이건 바로 기업의 직접적 손실로 되돌아올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 입장에선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성희롱이냐" "이젠 여직원들과
농담도 못하게 됐다"는 식으로 푸념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하소연들 마저 "당하는" 여성들의 고충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남성 중심적인 사고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직장내 성희롱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로인해 여성들이 일터에서 피해를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성희롱으로부터 여성들을 보호하는건 정부 기업 남성들 모두의 몫인
셈이다.

< 차병석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