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정전협정 파기 및 판문점 무장병력 투입사태로 전반적인 남북한
관계가 급랭하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대외 경제활동과 대북한 경협사업에는
일단 별다른 충격이 가해지지 않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우리 무역 업체들과 거래하는 해외 바이어들은 판문점사태에 그다지
불안감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기존의 상담 일정도 제대로 지켜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마도 한국의 주력 수출품목이 쉽게 바람을 타지 않는 중화학제품 위주로
변한 데다 이번 판문점 긴장이 북한의 "정치적 제스처"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 이례적인 것은 북한측이 기존의 남북 경협사업에 대해 아직 이렇다할
태도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판문점사태 이후 한국 기업인들의 북한방문 소식이 잇따르고 있어
항간에서는 엉뚱한 추측까지 나돌고 있을 정도다.

박영수 진로그룹 부회장이 지난6일 평양에 들어가 농산물 가공단지 조성
문제를 협의중이라는 설이 나돌고 있는가 하면 대우의 박원길전무가
남포공단가동을 앞두고 실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지난 9일부터 북한에
머물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같은 대기업 고위 관계자들의 북한 방문은 남북간 정치-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총선후 쌀지원 재개등 남북 경협이 급진전되는게 아니냐는 추측이 그럴싸
하게 들릴만도 하다.

우리정부도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는 강력한 응징으로 맞선다는 자세이지만
남북경협에 대해서는 당분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유연한 입장인
것 같다.

물론 북한의 불법적인 긴장조성 행위가 장기화될 경우 우리가 일방적으로
대북 경협 사업을 지속한다는 것은 명분도 없고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경협 사업에 관한한 정부의 자세는 뚜렷한 원칙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막말로 정치적 관계야 좀 변덕을 부린다 해도 크게 밑질 것이 없지만 경협
사업의 원칙마저 조변석개가 된다면 북한에 투자하고 있는 우리 기업들의
손해는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현재 진행중인 각종 경협 프로젝트들이 남북관계의 변덕으로
큰 차질을 빚고 있음은 우리가 보고 있는 그대로다.

지난해 이미 가동에 들어갔어야 할 대우의 남포공단은 아직 공장 설립
계약도 체결하지 못한 상태다.

삼성물산의 경우 공장을 못 세워 북에 들여간 스피커 제조장비가 그대로
방치돼 있다고 한다.

현재의 남북 긴장상태가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악화될 경우 사업자체가
무산될지도 모른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걱정하고 있다.

이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 북한내 정세가 안정돼야 하겠지만
우리 정부도 북한의 태도변화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좀더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 경제관계사를 들추어 보면 경협이란 원래 국가간 준전시 상황에서도
큰 방해없이 진행될수 있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지금처럼 남북간 정치-군사적 긴장관계가 고조되면 될수록 경제 관계라는
숨통이 틔어있을 필요가 절실함을 남북한 당국자들은 알아야겠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