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모아서 15대총선에 나설 계획이었다"

"개혁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던 장학로 전청와대제1부속실장이
20여억원의 떡값을 모은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정치를 하는데 돈이 들 수 밖에 없다는 것쯤이야 어린 초등학생도 알만한
상식이다.

특히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이라면 사무실임대료, 지구당사무직원
인건비등 가장 기본적인 경비만 해도 상당한 돈을 써야만 한다.

장씨의 선거자금마련 설명에 이해가 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상식중에 상식이 되어버린 일을 굳이 여기서 되풀이 하는 것은 15대총선을
앞두고 여야4당이 최근의 전국구공천에서 정치헌금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문제의 인사들을 많이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정치자금이 풍부한 여당의 경우에는 돈냄새가 덜나지만 야당은 이번에도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재력가인 현역의원을 전국구 3번에 배치했다가 하루만에 취소한 민주당의
명단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 정도다.

여야 모두가 정책에서 별다른 특색을 발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재야의 참신한 인사들을 많이 흡수해 일정한 지지층을 갖고 있던 민주당
지도부가 어떻게 이런 인사를 공천했을까.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정치헌금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을 것이다.

본인은 물론 민주당도 부인하고 나섰지만 그런 해명을 액면그대로 믿을
국민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한정없이 돈이 들어가는 선거를 앞두고 당사까지 매각할 수 밖에 없었던
민주당의 자금사정을 감안한다 해도 말이 안된다.

정강과 정책을 내세우는 정당이 당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 인사를 자금조달
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가.

정강도 정책도 없이 오로지 선거운동에서 얻을 수 있는 잇점 때문에 문제의
의원이 만들었던 무정파연합이 차라리 국민앞에 솔직한 것이 아닐까.

전국구 국회의원제도의 취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한마디로 이 제도는 지역구 선거의 사표를 보완하고 지역기반이 없거나
약해 지역구에서 당선되기 어려운 직능대표나 전문가들을 발탁, 의정활동의
질을 높이자는데 그 취지가 있다.

그러나 전국구제도 도입이래 이같은 취지가 충분히 반영된 적은 한번도
없다.

이번에는 취지를 살리겠지하며 매번 기대를 가졌었지만 단 한번도 실망하지
않은 적이 없다.

물론 신한국당이나 국민회의등이 장애법조인을 상위순번에 넣고 양념처럼
이기는 하지만 여성도 상위순번에 배치하는등 노력을 한 흔적은 보인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다.

일일이 이름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정치에 조금만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야4당의 전국구후보명단에서 문제의 인물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국민의 대변자로 뽑을 수 있을 까 묻지 않을 수 없는
인사들이 상당수 끼여 있다.

이번에 선거법이 바뀌어 지역구 후보에게 던지는 한표 한표가 모인 각정당
의 득표율이 바로 이런 사람들의 국회진출을 돕는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차라리 기권을 하고 싶은 심정까지 든다.

이런 모든 문제의 근원은 전국구후보를 선정하는데 당내에서 민주적절차를
거치지 않은채 당총재들이 거의 전권을 행사하는데 있다.

흔히 의외로 꼽히는 인물에 대해서 당에서는 당에대한 기여도가 공천의
기준이 됐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당총재에 대한 기여도 실세와의 친소관계 헌금기여도등이
결정적인 기준이 된 경우가 대부분으로 보인다.

유신시대에는 집권당이 아예 안정의석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삼아 입법부의
대표들을 유정회의원이라는 이름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더니 민주화됐다는
시대에 와서는 정치지도자들간의 전리품처럼 운영된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전국구라면 오직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불러올
뿐이다.

이번에는 이미 늦었지만 차라리 없애버리자는 의식이 국민들간에 확산되기
전에 여야지도자들이 모여 개선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개선방법은 간단하다.

제도자체를 바꾸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우선돼야할 것은 공천과정의
공정성이다.

전국구 본래의 취지를 100% 살리도록 당총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방식을
우선 개선해야 한다.

전국구공천자들을 상대로 유권자가 선택을 할 수 있는 제도의 도입도 필요
하다.

전국구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정당명부식비례대표제의 도입은 그런면에서
하나의 개선점이 될 수 있다.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역구의원과 마찬가지로 전국구의 경우도 잔여
임기가 1년미만일 경우 다음순위의 후보자가 자동승계하는 방식도 재고해야
한다.

국회에서 의원선서조차 못하고 1~2개월동안 금뱃지를 다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어처구니 없는 제도는 존속시킬 가치가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