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방을 나가려는 대옥을 막아서며 사과를 하였다.

"대옥 누이, 또 내가 말을 잘못 했어. 자견이에게 원앙금침 운운한
것은 자견이랑 금침을 함께 덮겠다는 말이 아니라 바로."

여기까지 말하다 말고 보옥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바로 대옥과 함께 원앙금침을 덮겠다는 말이고 자견에게는 다만
그 원앙금침을 깔아 달라고 한 것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할 참이었으나,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오히려 대옥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할지 몰랐다.

"보옥 오빠가 어떤 여자랑 금침을 함께 덮든지 난 관심이 없어요.

내가 화가 나는 것은 말이죠.보옥 오빠가 여자들을 노리개감으로
삼는 듯한 그 상스러운 말투 때문이에요.

어디서 그런 말투를 배웠죠? 시정잡배들에게서 배웠나요.

지저분한 책들을 읽고 배웠나요?"

"앞으로는 조심할게. 제발 화를 풀어"

이렇게 보옥이 대옥과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습인이 소상관으로
달려와 보옥에게 가정 대감의 전갈을 전했다.

"배명이가 와서 말이죠. 가정 대감님이 도련님을 급히 찾는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보옥은 일순 긴장된 얼굴로 습인을 따라 소상관을 나왔다.

이홍원으로 가서 옷을 다시 갈아입고 하인 배명과 함께 대관원을 나와
아버지를 뵈러 가는 보옥의 모습은 마치 매를 맞으러 가는 아이처럼 바짝
얼어 있었다.

허겁지겁 담장을 돌아가는데 뒤쪽에서 난데없이 큰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보옥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니 저쪽 모퉁이에서 설반이 껄껄 너털웃음을
웃으며 손뼉을 쳐대고 있었다.

설반 녀석이 왜 저러고 있나 하고 보옥이 멍하니 바라보자 앞서 가던
배명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보옥 앞에 큰 죄라도 지은 듯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니, 왜 이러는거야?"

보옥이 배명과 설반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반이 보옥에게로 다가오며 그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내가 시킨 일이야. 배명이 보고 거짓말을 좀 하라고 했지. 아버지가
찾는다고 말이야. 그래야 빨리 달려올 거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예쁜 누이들이랑 노느라고 나같은 것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거들떠 보지도 않을 걸.

다 내가 한 짓이니 배명을 심하게 나무라지는 말어"

보옥은 아버지가 찾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하여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나 설반이 배명을 시켜 자기를 속인 것을 생각하면 부아가 나기도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