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홍이 가운에 대한 생각으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창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소홍 언니, 계세요?"

소홍이 창살 너머로 내다보니 같이 일하는 견습시녀 가혜였다.

가혜는 날랜 걸음으로 들어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방그레
웃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소홍이 맥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은 재수가 좋은 날인가 봐요.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습인 언니가 소상관에 심부름을 보내는
거예요.

보옥 도련님이 대옥 아가씨에게 보내는 차를 갖다주라고 말이에요.

그래 소상관에 갔더니 마침 대옥 아가씨가 대부인이 보내준 돈이라면서
하녀들에게 일일이 나눠주고 있지 뭐예요.

대옥 아가씨는 차를 건네받더니만 글쎄 나에게도 돈을 나눠주는 거예요.

그것도 두줌이나 말이에요.

난 너무 황송해서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가져왔어요.

이 돈 언니가 좀 맡아줘요.

내가 가지고 있으면 언제 다 써버릴지 모르니까"

그러면서 돈을 싸 가지고 온 손수건을 꺼내 풀어 보였다.

소홍은 그 돈을 세어보고 그 액수를 확인한 뒤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대부인이 보내주신 돈을 왜 대옥 아가씨가 하녀들에게 나눠 주었을까?"

소홍이 짐작은 하면서도 슬쩍 물어보았다.

"아마 이번에 보옥 도련님 간호하느라고 수고들 했다고 대부인이 돈을
보냈겠죠.

보옥 도련님에게 딸려 있는 시녀들에게는 대부인이 벌써 그 등급에
따라 상을 내리셨잖아요.

근데 참, 소홍 언니는 아무 상도 받지 못했죠?

소홍 언니도 고생을 많이 했는데 아직 견습시녀라고."

가혜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소홍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가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견습시녀 딱지를 갓 뗀 청문과 가하 따위도 상을 받았는데 언니라고
그들보다 못할 게 뭐 있어요?

혹시 보옥 도련님이 소홍 언니 마음을 알아차린 거 아닐까요?"

"내 마음이라니?"

소홍이 흠칫 놀라는 얼굴로 반문하였다.

"언니 마음이 보옥 도련님에게로 향하지 않고 가운 도련님에게로
향해 있는 거 말이에요"

가혜가 다시 밝은 표정이 되어 배시시 웃었다.

"이애두. 못하는 소리가 없어"

소홍이 가혜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창문 쪽으로 돌렸다.

소홍도 처음에는 보옥의 호감을 사고 싶은 마음이 많았으나 습인을
비롯한 시녀들의 등쌀에 그런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 무렵 가운이 소홍 앞에 나타나 연정을 불러 일으켰고.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