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세계자동차업계의 눈과 귀는 이탈리아 북부의 공업도시
튜린으로 집중됐다.

이곳에 위치한 피아트자동차 본사 회의실에서는 이때 지오바니
아넬리회장이 마이크앞에 서 있었다.

75세의 이 노신사는 떨리는 음성으로 사임을 발표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순간 회의실은 깊은 침묵속으로 빠져 들었다.

지난해말부터 예견돼온 일이었지만 막상 사임발표가 나오자 직원들의
표정은 굳어졌다.

아넬리가 없는 피아트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날의 아넬리회장 사임으로 지난 97년간 이어져온
"피아트자동차=아넬리가"의 등식이 깨졌다.

20세기중 피아트라는 단어뒤에는 항상 아넬리가가 붙어다녔다.

아넬리의 뒤를 이어 회장으로 선임된 인물은 아넬리가출신이 아닌
캐사르 로미티사장.

이렇게 되자 세계는 피아트가 앞으로 어떤 경영전략을 추구해 나갈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단 총수가 바뀌긴 했지만 피아트자동차는 기존의 경영전략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계획이다.

최근 신임 로미티회장은 글로벌화를 경영기치로 세계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여나가겠다고 언급, 80년대부터 추구해온 세계경영노선을 지속해 나갈
것임을 분명히 했다.

로미티회장체제하의 피아트는 앞으로 글로벌경영의 대원칙하에 3개
방향으로 사업을 펼쳐 나간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사업다각화전략을 그대로 끌고 가 그룹규모를 계속 확대해 나간다는
것이 그 첫번째 방향이다.

피아트는 다른 기업들이 업종전문화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다각화전략을 고수해 나갈 생각으로 있다.

피아트는 그동안 주력업종인 자동차를 중심으로 항공 화학 건설 철도
출판등 기회가 나는대로 사업영역을 넓혀 왔다.

앞으로는 방위산업과 금융사업을 확대해 나갈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두번째 방향은 외국자동차업체들과의 동맹및 제휴강화.

피아트는 지난해 프랑스의 르노자동차와 합병을 모색했었다.

그러나 여러 조건들이 맞지 않아 지금은 없던 일로 돼 버렸다.

피아트는 앞으로 외국기업들에 대한 합병이나 인수전략은 포기하고
그대신 경쟁기업들과의 전략적인 제휴에 적극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전략적 제휴의 일환으로 피아트는 현재 엔진을 공동개발.생산할수 있는
파트너를 물색중이다.

최우선 파트너대상으로 르노를 지목하면서 볼보나 다른 유럽자동차
업체들에 대해서도 협력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피아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세번째 경영전략은 해외생산확대.

피아트는 전통적으로 이탈리아국내에서 자동차를 생산, 해외에 파는
전략을 취해왔다.

90년대들어 남아메리카에 현지공장을 두긴 했지만 경쟁업체들에 비해
해외에 공장을 건설하는 일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동유럽과 극동지역에도 자동차공장을 건설하는 문제를
적극 검토하겠다는 자세를 내비치고 있다.

글로벌경영에 걸맞는 생산공장의 세계화를 추구해 나가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로미티회장은 피아트경영진중 해외공장진출 필요성을 역설해온
인물이었기에 피아트의 해외공장건설은 앞으로 급진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피아트는 이탈리아의 명실상부한 최대 민간기업이다.

이탈리아 노동인구의 5%를 고용하면서 국내총생산(GDP)의 4%에 해당하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피아트 매출액은 75조5,000억리라(약 450억달러)로 전년보다
15% 증가했다.

순익은 2조리라로 95%나 늘어났다.

이제 30년만에 새로운 선장을 맞은 거함 피아트호가 앞으로도 계속
순항할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이정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