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었다.
서자라는 자기 신분을 의식해서인지 보옥을 대할 때마다 심사가
뒤틀렸다.
보옥의 어머니 왕부인은 가환의 그런 성품을 고쳐보려고 애를 써보았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왕부인이 오빠인 왕자등의 아내,그러니까 올케 언니의 생일 잔치에
초대를 받고 대부인을 모시고 가려고 했는데 대부인이 가지 않겠다고
해서 자기도 가지 않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을 대신 보내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때 마침 가환이 글방에서 공부를 마치고 와서 문안 인사를 드렸다.
왕부인은 가환에게 오늘 글방에서 배운 것을 한번 써보고 또 읽어보라고
하였다.
가환은 왕부인이 앉아 있는 구들 위로 올라와 종이에 글을 쓰려고
하다가 주위에 있는 시녀들을 보고는 들볶기 시작했다.
"채하야, 어서 찻잔에 찻물을 부어"
"옥천아야, 왜 촛불 심지를 따지 않는 거야?
저렇게 촛불이 치직거리고 있는데"
"금천아야, 그렇게 불 앞에 서 있으면 여기가 어두워서 글을 쓸 수
없잖아. 멍청하게시리"
시녀들은 가환이 으레 그런 식으로 자기들을 들볶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시키는 일만 묵묵히
할 뿐이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또 지랄을 떨고 있네, 하고 투덜거렸다.
왕부인은 가환에게 주의를 줄까 하다가 다른 손님이 오는 바람에
꾹 참았다.
다른 시녀들에 비해 가환과 만만한 사이인 채하가 찻잔에 찻물을
부어주며 슬쩍 한마디 하였다.
"도련님, 좀 부드럽게 말할 수는 없어요? 저희들에게 공연히 미움
살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어때서? 요즘 가만히 보니까 채하 너도 나한테서 마음이 멀어지고
있어. 보옥이가 더 좋은 모양이지"
가환이 이야기를 엉뚱한 데로 끌고 가자 채하가 당황해 하며 손가락으로
가환의 이마를 쿡 찔렀다.
"내가 모를 줄 알고"
물러가는 채하의 등에다 대고 가환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환이 글을 써서 왕부인에게 읽어주고 있는데 왕자등 부인의 생일
잔치에 갔던 희봉이 돌아와 왕부인에게 들렀다.
왕부인은 생일 잔치가 어떠했느냐고 희봉에게 꼬치꼬치 물었다.
뒤이어 보옥도 생일 잔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하러 왔다.
시녀들이 보옥의 두건과 웃옷, 장화들을 벗겨주자 보옥은 어린아이처럼
달려들어 어머니 왕부인의 품에 안겼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