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발의 떡국이 또 앞에 당도하니 /
나이를 더 해 늙어 가는 것이 가련하다 /
아손들의 키 큰 것이 대견하니 /
안방에서 서로 하예하는 말이 별다르다"

조선조 헌종때의 선비 유만공의 "세시풍요"에는 설날의 유속을 이렇듯
태평스럽게 그려 놓은 대목이 있다.

그는 아침일찍 차예를 올리고 떡국으로 차린 아침상을 물린 뒤 손아랫
사람들의 세배를 받으며 덕담도 해주었다.

일찌감치 마신 이명주에 취기가 오른 그가 사랑에 누워 안방에서 식솔들이
도란도란 주고 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는듯 하다.

우리가 지닌 아름다운 풍속 가운데서도 설날아침 웃어른에게 세배를 드리고
절을 받은 어른이 "덕담"을 해주는 것처럼 고유하고 묘미가 넘치는 풍속은
없다.

언제부터인가 "축하인사"정도로 격하되어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서로
주고 받는 것으로 변해버렸지만 덕담이란 본래 웃어른이 연하자에게 주는
격려의 말을 이르는 것이다.

"신년의 덕담은 "이제 그렇게 되라"고 축원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그렇게
됐다니 고맙다"라고 경하함을 특색으로 한다"

최남선이 일찍이 "조선상식문답"에서 풀이해 놓은 것처럼 덕담의 묘미는
"이미 그렇게 됐다"는 축원 내용의 기정사실화라는 점에 있다.

손자뻘 되는 아이한테서 세배를 받고 나서 "많이 컸구나"하는 것은 그동안
큰 것과 금년에 자랄것 까지를 기정사실화한 이중구조의 문법형태를 지니고
있다.

"결혼하기 바란다"거나 "승진하기 바란다"는 등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식의 덕담보다는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한다면서"하거나 "과장으로 승진
한다더군"하는 것이 옳은 덕담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미래의 일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더 적극적인 격려의 뜻을 전하는
것이 옳은 덕담법이다.

풍속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가족구성원의 위계질서도 점차 수직관계에서 수평관계로 급격히 변해가고
있는 요즘 세태에 설 인사를 동등하게 서로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왕 자녀들의 세배를 받는 바에야 덕담 한마디쯤은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때로는 악담이 덕담도 될수 있다지만 "공부 잘해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길
바란다"보다는 "아주 좋은 성적으로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는구나"하는
덕담이 훨씬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