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의 벽은 높아만 가고""이리저리 흔들어도 돌부처는 끄덕도 않고"
최근 조훈현 구단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들이다.

올들어 조구단은 제자 이창호 칠단과 4번의 반상대결서 모두 패배,
새해를 맞으며 다진 각오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기성전 배달왕전 대왕전 타이틀에 잇따라 도전했지만 지난해에 이어
이창호의 두터운 벽을 실감했을 뿐이다.

아무리 사제지간이지만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승패의 감정이 다른
것은 자명한 사실.

설상가상 조구단은 동양증권배 세계바둑대회 준결승전서 중국의 마샤오춘
구단에게도 1승2패로 무릎을 꿇어 아쉬움을 더했다.

반대로 이창호는 국내 타이틀 19연승 행진등 올들어 한번도 패하지 않는
괴력을 보이며 철옹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를두고 바둑계는 "이칠단의 시대가 최소한 10년은 간다"며 조훈현의
쇠락을 역으로 꼬집는다.

지난 72년 일본서 귀국, 74년 부산 최고위를 거머쥐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조훈현은 80,82,86년 한반도의 모든 타이틀을 섭렵하며 20년간
국내 바둑계의 황제로 군림했다.

그러나 영원히 해가 지지 않을 듯한 조훈현제국도 바로 제자 이창호에
의해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2월 마지막 남은 대왕타이틀마저도 제자에게 내주면서 조구단은
사실상 "무관의 제왕"으로 전락하는 수모가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어느 프로기사는 "조구단이 이창호를 너무 어려워 한다"며 그동안의
반집패나 역전패를 상기시키면서 "끈기와 뒷심으로 재무장만 하면 그렇게
허무하게 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힌다.

불혹을 넘기면서 찾아오는 체력과 의지의 한계이지 결코 실력의 차이는
아니라는 말이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지간 대결은 앞으로 수년간은 계속될 것이다.

그만큼 두사람과 자웅을 겨룰만한 기력을 가진 프로기사가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

서봉수 구단은 지난 93년이래 좀체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유창혁
칠단은 기복이 심해 아직은 더 다듬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조.이의 상황이"지는 해와 뜨는 해"의 차이로 보이는 것이
사실일지는 몰라도 하지만 노병은 죽지 않는 법.

조만간 맞붙게 될 패왕전과 롯데배최고위전서 조구단의 선전을 기대하는
것이 결코 욕심은 아닐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