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 사회과학원 원장 >

지금 세계는 격변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 대전환의 순간에 놓여 있다.

과거의 질서는 무너지고 새로운 방향은 불투명하다.

우리들의 익숙한 논리와 사고방식은 점차 그 적실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과거의 성공은 미래의 가능성을 위협한다.

한국경제는 지금 무너지고 있는 세계질서의 틀 속에서 성장했다.

냉전구조를 전제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경제는 냉전이 종식된 지금 과거의 성공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거의 논리와 정책은 새로운 세계질서의 틀 안에서는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냉전질서는 우리의 실질적인 경제공간을 서방세계로 국한시켰다.

그러니까 소련 중국 동유럽등 공산국가만 제외된 것이 아니라 인도를
비롯한 많은 제3세계 국가들도 일종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정책을 추구
하면서 서방경제권으로부터 사실상 분리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국경제는 미국이 주도하는 북미대륙과 일본 유럽등으로 구성된
제한된 경제공간의 틀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다시말하면 냉전시대의 한국은 선진산업 경제권안에 자리잡은 몇 안되는
개도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냉전시대에 한국이 점유했던 경제공간의 이와같은 특징은 한국이 저임금
노동을 경제성장의 주요수단으로 활용하도록 했을 뿐만아니라 서방선진국을
수출시장으로 선택하게 했다.

실제로 세계에는 동원가능한 저임노동력이 산재해 있었으나, 서방경제공간
의 테두리 밖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예를 들면 중국의 잠재적 경쟁
없이 매우 유리한 조건에서 수출확대를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미국은 냉전의 전략적 필요성 때문에 서방진영에 속하는 우방국들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관대한 통상정책을 유지함으로써 한국은 시장개방의
압력을 받지 않고 수출드라이브를 추진할수 있었다.

물론 미국이 자신의 시장은 개방해 주고 상대방의 시장개방은 요구하지
않을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미국경제가 모든면에서 우위에 있었기 때문
이라고 할수 있지만 그 기본동기는 냉전의 전략적 필요성에 있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50년대에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당시 한국은
6.25동란으로 인하여 경제성장을 추구할만한 국내 여건을 갖추지 못했던
반면에 일본과 유럽은 냉전의 특수상황을 최대한 이용할수 있었다.

실제로 한국이 성장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되는 70년대에는 이미 일본과
유럽이 2차대전직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경제를 회복하고 오히려
미국경제에 도전함으로써 미국의 대외경제정책은 보다 이기적인 방향으로
수정되기 시작했던 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나 한국은 70년대에 비로소 냉전이 제공한 여건을 활용하는 성장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한국은 냉전의 경제적 환경이 이미 사라지기 시작하는 시기에
냉전환경에 적합한 정책을 적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두말할것도 없이 한국의 성장정책은 시간에 쫓기면서 초고속으로 달려야
하는 숨가쁜 경주였다.

시장이 확보돼 있는 수출산업의 육성은 자본의 조달이 최대 제약조건
이었다.

아직 자본의 공급은 정부의 재량에 속할 수밖에 없었으며, 정부는 목표
달성을 위한 정책수단으로 자본의 배분을 결정했다.

이것이 바로 정책금융의 배경이다.

그리고 정책금융은 특혜금융을 낳았고 특혜금융은 이른바 개발권위주의
체제를 가능하게 했다.

정부는 경제활동을 규제하는 수준을 넘어 경제를 주도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대기업은 재산소유형태만 자본주의적이고 기업운영은 국가기업과
동일한 방식을 택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결론적으로 냉전시대 한국경제의 성장전략과 정치체제및 정부기능은
근본적으로 냉전의 전략적 필요성에 기인하고 있었다고 할수 있다.

냉전은 종식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냉전체제는 내부적으로 오랫동안 변질되어 왔다.

그러나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세계는 냉전체제의 속박
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냉전의 종식은 한국의 경제공간을 북한과 쿠바를 제외한 전세계로 확대시켜
주었다.

중국 소련 동유럽등 모두 한국과 같은 경제권에 속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선 한국의 경제활동 무대가 크게 넓어진 것을 의미한다.

수출시장은 서방경제에 국한되지 않고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게 되었고
미국시장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감소되었다.

한국의 경쟁 상대도 크게 늘어났으며, 저임금 노동은 더이상 경쟁수단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경제가 대외지향적 성장정책을 추구하게 되면서 한국은 저임금
노동정책을 주요 경쟁수단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냉전의 종식은 냉전이 구소련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얼마나 소모적이었는가
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냉전초기에 세계 최대 채권국가였던 미국은 냉전말기에는 세계 최대
채무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세계 GNP의 반이나 차지했던 미국은 세계 GNP의 4분의1 이하로
떨어졌고 누적되는 재정및 무역적자는 미국경제의 총부채율을 국민총생산의
2.6배까지 올려 놓았다.

미국경제는 더이상 세계경제의 기관차역할을 할수 없게 되었다.

세계경제의 고민은 미국의 기관차 역할을 대신할 경제가 없다는데 있다.

19세기 국제경제의 은행역할을 했던 영국이 제2차대전으로 자본공급 능력이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을때 미국이 과거 영국의 역할을 담당할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세계경제의 경기조정은 어떤 한 나라가 주도할수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다자간 협력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국경제는 세계경제의 미래가 매우 불안정할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운영
되어야 한다.

경기변동의 폭이 예상을 초과하는 경우에도 그 파급효과를 줄일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장기 계획뿐만 아니라 단기 적응능력이 중요하다
는 뜻이 된다.

국가경제를 정부가 주도하는 종합적 투자계획에 맞추어 운영하는 방식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기업들과 개인들의 결정들이 자유롭게 이루어짐으로써 경제전체로 볼때
항상 적응과 재적응의 흐름을 통해 균형을 유지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근 세계경제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자본시장의 세계화다.

제2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미국은 제1차대전 직후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가지고 브레튼 우즈 체제를 출범시키고 미국이 세계경제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본공급자 역할을 담당하기로 결정했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미국의 대외경제정책은 냉전의 필요성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근본적으로 서유럽과 일본을 반소세력으로 키우기 위한 정책
이었다.

이와같은 미국의 냉전 경제정책은 정책입안자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서유럽과 일본은 예상보다 빨리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60년에는 미국
경제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미국의 국제수지가 악화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닉슨은 바로 일본과 유럽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1971년 브레튼 우즈
체제를 포기하기로 하고 미달러를 금본위제도의 속박으로부터 풀어 주었다.

이미 유럽달러시장이 급성장해 온 상태에서 변동환율의 등장은 자본의
이동을 더욱 시장기능에 맡기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80년대에는 더 많은
나라들이 국제금융시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자국의 금융시장을
과감하게 자유화하는 조치들을 취하게 되었다.

자본시장의 세계화는 바로 이런 결정들의 누적적인 결실이라고 할수 있다.

물론 좀더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적 발전이야말로
자본시장의 세계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할수 있다.

사실 시장의 본질은 정보와 통신에 있다.

정보의 교환없이는 시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정보통신 능력의 한계가 시장의 한계를 결정한다면 20세기 후반에
진행되고 있는 정보통신 기술의 혁명은 결국 모든 시장의 세계화를 뜻한다.

세계화된 시장에서 자본은 가장 유리한 조건을 찾아 이동한다.

자본의 흐름은 국경도 애국심도 군사력도 종교도 그 누구도 인위적으로
막을수 없다.

이것은 하나의 놀라운 혁명이다.

앞으로 자본을 이 땅위에 멈춰두려면, 즉 자본투자를 유인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경쟁적인 조건을 제공하는 길 밖에 없다.

더 좋은 질의 노동력을 경쟁적인 비용에 제공하고 생산과 유통에 필요한
사회간접시설과 투자의 안전을 보장할수 있는 정치적 안정, 그리고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규칙을 제공하는 것만이 전지구를 하나의 무대로 이동하는
자본을 끌어들일수 있는 방법이다.

탈 냉전시대 정부의 경제적 역할은 분명하다.

자원을 배분하는 일은 정부의 일이 아니다.

물론 세계경제의 흐름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투자 소요분야를 예측하는
역할은 정부도 참여할수 있다.

그러나 제한된 자본자원을 정부의 판단에 따라 배분하는 것은 자본시장이
세계화된 시대에는 역기능적이다.

자본시장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경제는 지역화 경향이 뚜렷하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유럽연합(EU)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그리고 동아시아지역의 역내집중화
현상은 범세계적 무역기구(WTO)의 출범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추세다.

자유화 움직임은 유럽에서 시작되었으며 근본 동기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19세기 독일통일 이후 유럽의 세력균형은 이른바 "독일문제"로 안정을
상실하게 되었고 2차대전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유럽통합을 통해 독일문제를
극복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1990년 독일이 재통일되면서 유럽통합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게
되었고 마스트리히조약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유럽이 단일통화 단일군사정책등을 실현하기 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독일문제"라는 지정학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유럽의 통합은 계속 추진될 것으로 본다.

NAFTA는 유럽과 동아시아를 향한 미국의 지정학적 포석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대안이 있다는 사실을 시위하고 동시에 "멕시코문제"를 처리해
보려는 과감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의 APEC에 대한 태도는 항상 어느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아시아
국가들의 시장개방을 유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동아시아지역은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지난 30년 동안 세계의 경제력비중이 상대적으로 동아시아로 이동한 것이
사실이며, 최근의 성장패턴이 계속된다면 10년 이후에는 동아시아의 경제
규모가 세 지역중 가장 클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국경제의 교역과 해외투자도 지역내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동아시아지역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나라들이 많을 뿐아니라
세력균형의 급격한 변동가능성 때문에 안보위험이 내재하고 있으며 기술의
후진성과 능률향상의 한계점등으로 미래를 낙관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한국경제는 바로 이처럼 불안한 미래의 지역에 더욱 깊이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보험정책은 없는가.

앞으로 한국경제의 중요한 전략적 선택은 지금처럼 수동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 더욱 깊이 통합될 것인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북미경제와의 연결을
강화하고 APEC를 실제 내용에 있어서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며 유럽과도
관계심화를 촉진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즉 지역화전략과 세계화전략의 선택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