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가격이 치솟고 있다.

옥수수는 26일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11년반만의 최고치로 올랐다.

밀과 콩 값도 수년만의 최고수준에 달했다.

하지만 미국 콘벨트(곡창지대)는 시름에 잠겨 있다.

농부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이들과 매매계약을 맺은 중간상들도 한숨만 내쉰다.

중간상들의 도산이 속출하고 농부와 중간상간에 법정싸움까지 터지고 있다.

가격급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비명을 지르는 원인은 수확및 가격 예상이
빗나갔다는데 있다.

예상을 잘못해 파생상품 거래로 손해를 입은 것이다.

미국 농부들은 예로부터 파종 무렵에 중간상인 창고업자들과 선도(forward)
계약을 맺는다.

추수기에 일정 품질의 곡물을 일정량 인도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이다.

이 계약을 맺음으로써 농부는 추수기에 가격이 폭락해 손해보는 위험에서
벗어난다.

반면 중간상인 창고업자는 선도계약을 통해 충분한 물량을 미리 확보할 수
있다.

창고업자는 농부와 선도계약을 맺은뒤 곧바로 CBOT나 시카고상업거래소
(CME)에서 선물(future)을 매도한다.

올해의 경우엔 곡물 수확이 부진해 추수기의 가격이 파종기에 예상했던
수준보다 월등히 오르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곡물 가격이 올라봐야 이미 "입도선매"를 마친 농부들에겐 이로울게 없다.

속만 상할 뿐이다.

올해는 일기가 좋지 않아 많은 농부들이 계약한 만큼의 곡물을 수확하지
못했다.

계약을 지키려면 현물시장에서 비싼 값에 곡물을 매입, 창고업자에게
넘겨야 한다.

농부들은 일방적으로 납기를 연기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충분한 물량을 수확하고도 계약을 지키지 않는 농부들도 많다.

헐값에 넘기기엔 억울하다고 생각한 일부 농부들은 "수확이 부족했다"는
말로 창고업자를 속인뒤 곡물을 현물시장에서 비싸게 팔고 있다.

이렇게 되면 곡물을 확보하지 못한 창고업자만 골탕먹게 된다.

선물계약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시골의 창고업자들은 대개 영세하다.

오하이오주 곡물업체 앤더슨스 매니지먼트사의 윌리엄 도즈는 "영세한
창고업자들은 20만달러의 손실만 입어도 견디기 어렵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번 파문으로 많은 창고업자들이 망했다.

미네소타주의 곡물 중간상 트리라인 파머스사의 경우 곡물값이 예상외로
오르는 바람에 선물거래로 1백50만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자 이 회사는 곡물 인도 계약을 어긴 4명의 농부를 미네소타 지방법원
에 고소했다.

네브라스카주의 창고업자 그레이트 플레인스사는 곡물 파생상품 거래로
3백만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이 바람에 35명의 종업원이 일자리를 잃게 됐다.

결국 이 회사는 다른 창고업자와 합병하기로 했다.

계약을 어긴 농부들도 장기적으로 손해를 피할 수 없다.

앞으로 창고업자들은 농부들과 곡물 선도계약을 맺을 때 비싼 "보험료"를
요구할 것이다.

이처럼 곡물 유통질서가 문란해진 와중에 "농부들에게도 혁신적 위험관리
수단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세계무역기구(WTO) 발족으로 농업보조금 삭감이 불가피
하기 때문에 농민들이 스스로 위험을 헤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미국정부는 30년대부터 농부들이 "실물(곡물) 인도를 수반하지 않는 파생
상품 장외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내년 봄 이 규제가 완화되면 농부들도 장외시장에서 선물이나 옵션을
사고팔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규제완화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번과 같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해서는 규제완화는 농부들에게 부담만
안겨줄 뿐이다.

<김광현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