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혁명"( Glorious Revolution )이란 본래 1688년 영국에서 일어난
무혈시민혁명을 일컫는 서양사 전문용어이다.

이 혁명은 왕권과 의회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게하고 의회정치발달의
기초를 다져 놓음으로써 영국이 시민 민주주의의 선두를 달리는 진취적인
국가가 되게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1685년 왕위에 오른 제임스2세는 가톨릭교 부활정책과 전제주의를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그는 국교인 성공회를 무시하고 "신앙 자유선언"을 반포한뒤 가톨릭교도를
문무의 관리로 등용했다.

그리고 이런 처사에 반대하는 켄터베리대주교등 7명의 성직자를 투옥했다.

1685년 "먼머스공반란"때는 1,000여명의 용의자를 체포해 사형시키거나
외국으로 추방시켰다.

당시의 재판은 "피의 재판"으로 불렸을 만큼 무자비한 것이었다.

가톨릭신자였던 그는 끝내 왕당파들도 반대하는 가톨릭회복을 선언해
국민들의 반감에 불을 붙였다.

결국 의회의 정당들이 제임스2세의 사위인 네델란드 총독 윌리엄을
귀환시켜 왕으로 옹립하고 제임스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새 의회는 제임스2세를 폐위시키고 윌리엄3세와 매리2세에게 공동왕위를
제의했으며 마그나 카르타에 비견되는 의미를 갖는 "권이선언"(뒤에
권리장전)이 승인됐다.

혁명의 과정에서 제임스2세의 군대가 모조리 투항해와 피한방울도 흘리지
않은 "명예혁명"이 이루어 진 것이다.

이 혁명으로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기때문에 왕은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왕은 항상 법을 초월한다"는 왕권신수설이 지배하던
영국의 절대주의 체제가 종말을 고했다.

또 정치에 있어서는 의회의 세력이 확립되고 도시상공업시민과 지방의
젠트리층의 영향력이 자리잡았다.

김영삼대통령은 최근 대국민담화에서 "역사바로세우기는 국민의 자존을
회복하고 나라의 밝은 앞날을 여는 "명예혁명""이라면서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김대통령이 지칭한 "명예혁명"이 단순히 무혈혁명을 뜻하는 것인지,
그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300여년전 영국의
"명예혁명"에서도 배울점은 많다.

한국의 "명예혁명"이 실제로는 법을 초월해 절대군주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던 대통령의 권한에 어떤 변화를 몰고올지 궁금하다.

영국은 "명예혁명"으로 신앙의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사법권의 독립
이라는 큰 열매를 얻었다.

윌리엄3세가 소수의 관리들과 의논해 국정을 처리한데서 학자들이 내각제
의 기원을 이 시기에 두고 있다는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