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는 연말연시의 사회 분위기엔 양면성이 있다.

무덤에 한발짝 다가선다는 감상적 일면위에 보람찬 수확과 새해맞이의
설레임이 자축의 흥을 돋운다.

한데 올 연말은 뭔가 예년과 다른 것을 느끼게 만든다.

이미 망년회 시즌에 들어섰는데도 한해의 회포를 푸는 흐뭇함, 새해 덕담을
미리 주고 받는 기쁨쪽 보다는 썰렁하다는 쪽에 가깝다는 말들이 주변에서
오간다.

근년 이런 연말은 셀 수 있을 만큼 드물었던 것 같다.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리란건 두말할 필요도 없으나 일반으로는 아마도
10.26, 12.12가 났던 1979년말 이상 더 썰렁한 연말은 없었던 것으로 뚜렷이
기억될 것이다.

소련에서 KAL기가 격추되고 뒤이어 아웅산 참사가 있던 83년의 말에도 퍽
쓸쓸했음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올해 같지는 않았던 걸로 회상된다.

혹시 한강다리 못건너 쩔쩔매던 기억, 야밤중 남진하는 탱크의 굉음에
잠설치던 아닌밤중 홍두깨 같던 12.12의 기억들이 그렇잖아도 생생한데
그 주역들의 몰골이 TV에 비치는 요즘이 바로 12월12일께라 더 을씨년
스러운지 모른다.

그러나 좀더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올 세모가 유난히 썰렁하다고 입을
모으는데는 막연한 느낌이기 보다는 좀더 뚜렷한 현상과 좀더 그럴싸한
원인이 있을 터가 아니겠는가.

가령 호텔 망년회 예약이 현저히 줄고 백화점세일 매상이 격감한 고소득층
상대 경기뿐 아니라 시장 대폿집 택시등 온갖 서민적 경기도 주름이 뚜렷한
현상을 대수롭지 않다 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고소득층이나 양지층이 남의 눈에 나는 언동을 삼가며 소비성 지출을 절제
하는 결과 나타나는 현상뿐이라면 오히려 바람직한 측면이 더 크지, 그다지
이러쿵 저러쿵 문제삼을 필요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중간층-저소득층의 생할패턴에 어떤 위축적 현상이 비치는 정황은
시장경제원리상 수요-생산 위축을 유발하는 단서가 되며 그런 현상이 시간-
공간적으로 연장되고 확대된다면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수는 없다.

특히 중요한 것은 가시적인 행태보다 그같은 행태를 하게 되는 시민의
심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그런 현상이 계속 드러나는 지도층의 충격적 비리-부패에 국민들이
자성, 나부터라도 낭비성 소비를 자제하자는 징후라면 길게 보아 일시적인
위축 이상 희망적이다.

그러나 반대로 진전되는 정국을 지켜보는 국민이 그 속에서 분명한 지향
목표나 운영원칙 대신 즉흥 편파 보복적 또는 대중 영합적이라는 판단,
한치도 앞을 내다볼수 없다는 실망끝에 취하는 행태라면 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다.

만일 내심 그런 판단이 간다면 정부는 더 늦지 않게 대응하라.

정국운영상 국민이 예측 가능하고 상식에 맞는 분명한 방향과 원칙을 제시
해 그대로 실행하라.

더이상 즉흥적 인기영합성은 피하라.

비록 당장 지탄받아도 길게 국익상 필요하면 떳떳이 설득하며 추진해야
정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