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유진 크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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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생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우리 직원
들과 함께 동산 문화재의 거의 전부를 전쟁의 와중에서 무사히 보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90년 타계한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
박사는 "박물관과 한평생"이라는 자서전에서 이렇듯 당당하게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문화재를 부산까지 대피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미국인 유진 크네즈에 대한 고마움도 있지않고 여러번 기록해 놓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자유당정부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려두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서울이 함락되고 북에서 내려온 물질문화보전위원회 파견원은 박물관
직원들을 시켜 국보급 문화재를 포장까지 해놓았으나 9.28 서울수복으로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천행으로 문화재들이 겨우 북송을 면한 셈이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때, 빨리 박물관유물을 소개시켜야한다고 김관장에게 충고한 사람이
크네즈였다.
문교부장관 백락준을 세번이나 만난 끝에 겨우 박물관유물소개를 허락
받은 김관장은 그해 12월5일 크네즈가 주선해준 미국의 대형화물차
한칸에 유물을 싣고 4일만에 부산에 안착했다.
크네즈는 뒤이어 박물관에 두고 온 "서역유물"을 가져올 때도 역시
열차를 주선해 주는등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협조로 부산에 대피한 유물은 2만여점에 이른다.
유진 크네즈는 미국인으로 미군정청의 교육문화담당관과 공보관을
역임했다.
한국문화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던 그는 교육문화담당관으로 부임해
종교문화단체를 감독하던 "학무국"을 "교화국"으로 바꾸고 "교화국"에서는
문화재등 문화유산을 보호하는데 주력하도록 하는 획기적 정책을 폈다.
해체됐던 "원각사지 10층석탑"의 복원과 한국최초의 고고학적 발굴인
경주의 "호우총발굴"이 그의 교육문화국장 재임때 이루어진 것도
특기할만하다.
한국문화에 대한 남다른 그의 학문적 관심과 애정은 귀국후에도
이어져 "김해 삼정동의 사회학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뒤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 줄곧 한국문화를 연구하면서 "한국의
불교"등 세차례나 한국특별전을 열어 한국문화 소개에 앞장서왔다.
정부는 최근 유진 크네즈박사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지금도 한국을 "첫사랑"처럼 여긴다는 80노구의 그에게 45년만의
서훈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의 서훈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김재원 김원용박사등 당시 옛친구들이
대부분 타계했으니 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0일자).
들과 함께 동산 문화재의 거의 전부를 전쟁의 와중에서 무사히 보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90년 타계한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
박사는 "박물관과 한평생"이라는 자서전에서 이렇듯 당당하게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문화재를 부산까지 대피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미국인 유진 크네즈에 대한 고마움도 있지않고 여러번 기록해 놓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자유당정부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려두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서울이 함락되고 북에서 내려온 물질문화보전위원회 파견원은 박물관
직원들을 시켜 국보급 문화재를 포장까지 해놓았으나 9.28 서울수복으로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천행으로 문화재들이 겨우 북송을 면한 셈이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때, 빨리 박물관유물을 소개시켜야한다고 김관장에게 충고한 사람이
크네즈였다.
문교부장관 백락준을 세번이나 만난 끝에 겨우 박물관유물소개를 허락
받은 김관장은 그해 12월5일 크네즈가 주선해준 미국의 대형화물차
한칸에 유물을 싣고 4일만에 부산에 안착했다.
크네즈는 뒤이어 박물관에 두고 온 "서역유물"을 가져올 때도 역시
열차를 주선해 주는등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협조로 부산에 대피한 유물은 2만여점에 이른다.
유진 크네즈는 미국인으로 미군정청의 교육문화담당관과 공보관을
역임했다.
한국문화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던 그는 교육문화담당관으로 부임해
종교문화단체를 감독하던 "학무국"을 "교화국"으로 바꾸고 "교화국"에서는
문화재등 문화유산을 보호하는데 주력하도록 하는 획기적 정책을 폈다.
해체됐던 "원각사지 10층석탑"의 복원과 한국최초의 고고학적 발굴인
경주의 "호우총발굴"이 그의 교육문화국장 재임때 이루어진 것도
특기할만하다.
한국문화에 대한 남다른 그의 학문적 관심과 애정은 귀국후에도
이어져 "김해 삼정동의 사회학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뒤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 줄곧 한국문화를 연구하면서 "한국의
불교"등 세차례나 한국특별전을 열어 한국문화 소개에 앞장서왔다.
정부는 최근 유진 크네즈박사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지금도 한국을 "첫사랑"처럼 여긴다는 80노구의 그에게 45년만의
서훈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의 서훈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김재원 김원용박사등 당시 옛친구들이
대부분 타계했으니 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