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에게서 보채가 물러가자 대옥이 슬그머니 보옥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보채랑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정답게 주고받았어요? 서로 수작을
거는 남녀처럼 말이에요?"

대옥의 얼굴에 냉소가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수작이라니? 말조심해"

보옥이 정색을 하고 나무랐다.

"그럼 수작이 아니고 뭐예요? 여자가 남자 옆구리를 쓱 찌르고.
정말 가관이더군요"

대옥이 시기심이 활활 타는 눈으로 보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보옥은 그런 대옥의 두 눈이 무섭기는 커녕 너무도 아름답게 여겨져
어찔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시를 짓는 것을 도와주었을 뿐이야"

그러고는 보옥이 네번째 시상을 가다듬기 위해 대옥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그럼 나도 시 짓는 것을 도와주겠어요.

보옥 오빠는 먼저 지은 세 수의 시를 잘 정서하세요.

네번째 것은 내가 지어줄 테니"

보옥은 오히려 잘 되었다 싶어 대옥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대옥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기더니 금방 시를 한 수 종이에
적어서 그것을 돌돌 말아 보옥에게 던져주었다.

보옥이 펼쳐보니 자기가 지은 것들보다 더 나은 것 같았다.

그렇게 지은 네 편의 시를 보옥이 원춘에게 보이자 원춘은 보옥이
대견하다는 듯 연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다음은 연극 관람으로 들어갔다.

열두명의 여배우들을 거느리고 아까부터 다락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장이 상기된 얼굴로 막을 올렸다.

4막으로 된 그 연극의 제1막 제목은 "호연"이었다.

어느 부잣집에서 벌어지는 잔치 장면이 무대위에 펼쳐졌다.

마치 지금 후비를 위해 별채 원내에서 베풀어지고 있는 연회를 연상시킬
만큼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그 잔치에서 부잣집 아들과 초대받아 온 대감의 딸이 서로 눈이 맞아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무르익어 보라빛 장래가 약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제1막이 끝날때까지 밝고 활기찬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제2막 "걸교"로 넘어와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걸교는 칠석날의 제사를 가리키는 말로, 견우와 직녀가 일년동안 헤어져
있다가 까치들이 머리를 맞대어 만든 오작교를 밟고 서로 상봉하는 장면이
눈물겹게 펼쳐졌다.

후비 원춘은 자기가 성친을 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된 일이 견우 직녀의
상봉과도 같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걸교장면은 제1막의 남녀가 가슴아픈 이별을 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