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대 국왕중 학문이 가장 깊었던 분을 꼽으라면 세종대왕과 정조대왕
이라 할것이다.

세종대왕은 조선왕조의 문물제도를 정비해 놓은 큰 업적을 남겼고, 정조
대왕은 조선문화를 곱다랗게 마무리 지으면서 새 문화의 지평을 열어
놓았다.

세종시대를 찬란한 새벽노을에 비유한다면 정조시대는 화려한 저녁노을에
해당할 것이다.

새벽노을이 가시면 태양은 중천으로 떠올라 광명의 도수를 더해 가지만
저녁노을은 그 화려한 순간뒤부터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만큼 정조대왕은 불행을 짊어지고 태어난 분이었다.

시대적 불운 뿐만이 아니었다.

가정적으로도 한없이 불행한 분이었으니 아버지를 할아버지가 뒤주에 가둬
생목숨을 끊게 하고 그 일에 외가가 끼어들어 이를 부추기었으니 가장
가까운 혈육을 아버지의 원수로 삼아야 하는 비통한 삶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진외가와 외가의 처족들이 세도 다툼을 벌여 왕세손 시절
그 자리를 항상 위태롭게 하고 있었다.

이에반해 세종대왕은 참으로 복 많은 분이었으니 부왕인 태종이 세종의
치세에 걸림돌이 될까봐 조선 개국에 참여했던 공신세력을 일소해 주는 것은
물론 세종의 외가인 당신의 처가와 세종의 처가까지 모두 트집을 잡아
처단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오로지 문물제도 정비에만 매진하면 되었으니 그러기
위해 평생을 밤세워 공부하였다.

즉위초 하도 밤새워 책을 읽고 그를 간하는 신사들의 말을 듣지 않아
건강을 해치게 되자 상왕으로 있던 부왕 태종이 책을 빼앗아 불사르는
일까지 있었다 한다.

책을 불사르는 태종의 마음이 얼마나 흐뭇했었겠는가.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동궁시절 척족 세도 다툼의 와중에서 항상 밤이 불안하고 지친이 못미더워
선비들을 모아놓고 밤새워 공부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그것이 버릇이 되어 즉위후에도 매일 밤새워 독서하고 저술하는 일에
매달리게 되니 불과 49세에 승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홍재전서" 184권
100책이라는 방대한 규모의 문집을 남기게 되었다.

조선의 학자로 가장 저술이 많았던 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이 83세를
살며 "송자대전" 234권 102책을 남긴 것과 비교해 보면 정조대왕의 저술
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던가를 짐작할수 있다.

세종대왕이 문집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세종대왕은 학자가 되기 위해서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집현전 학사들을 올바로 키워 문물제도 정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문집을 남긴다는 생각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에 반해 정조는 학문 그 자체에 매료되었던 분이었다.

그러니 학문적 업적에 집착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세계 역사상 제왕으로써 가장 방대한 문집을 남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