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능력을 마음껏 펼치려면 홀로서야 한다"

미이스트만 케미컬의 최고경영자(CEO) 어니스트 디벤포트(57)는 이런
지론을 훌륭히 실천한 기업인이다.

94년초까지만 해도 이스트만 코닥의 별 볼일 없는 자회사에 불과했던
이스트만 케미컬을 성공적으로 독립시켰기 때문이다.

디벤포트회장은 유년시절 "교육과 노동"을 최고 덕목으로 배우며 자라났다.

방과후나 주말에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자동차 판매대리점에서 매장일을
돕거나 농장에서 면화를 따야 했다.

미시시피주립대 화공과를 졸업하던 60년 디벤포트회장은 이 두가지 덕목을
가슴에 새긴채 코닥에 입사했다.

바쁜 와중에도 MIT대에서 MBA를 따는등 "재충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생을 코닥에만 몸담아온 정통 "코닥맨" 디벤포트는 이런 성실성 덕분에
지난 89년 드디어 사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사장 취임 즉시 "경영전략팀"을 꾸렸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

나머지 팀원들도 40대후반이나 50대초반이었다.

"우리들은 10여년 남은 여생동안 뭘 하는게 가장 가치있을지 자문했습니다"
(디벤포트회장).

그결과 만장일치의 대답이 나왔다.

바로 "이스트만 케미컬을 세계 최고의 화학업체로 키우는것"이었다.

당시 세계 화학업체 랭킹에서 하향행진만 계속하던 매출 28억달러(88년
기준)규모의 이스트만 케미컬로서는 절실한 목표이기도 했다.

코닥에 있어 화학은 하찮은 사업이었다.

코닥의 설립자 조지 이스트만이 지난 1920년 이스트만 케미컬을 세울때도
단지 코닥필름 생산에 필요한 아세톤과 메탄올을 공급하는게 목적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회사의 전체사업중 필름용 화학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줄면서 모회사인 코닥과의 "탯줄"도 약해졌다.

이렇게 되자 94년 1월 코닥은 이스트만 케미컬을 "분가"시켜 버렸다.

독립과 함께 CEO가 된 디벤포트에게는 운도 따랐다.

그해 세계 화학시장은 5년간의 침체기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스트만의 94년 이익은 전년대비 64%나 증가한 3억3,600만달러에
달했다.

올해도 매출 52억달러(21%증가)에 이익 5억6,700만달러(69%증가)를 거둬
들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디벤포트회장의 홀로서기 작전 1호는 "세계화"전략이었다.

이스트만 케미컬은 미국고객에게만 물건을 파는 미국회사였다.

미국에서 팔고 남은 물건이 있으면 다른 나라에 파는 정도였다.

디벤포트는 이런 "폐쇄"형 체질을 개선하는데 착수했다.

우선 멕시코 스페인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에 페트 생산공장을 세웠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산소계 화학물 생산에 들어갔다.

세계 최고 인기투자대상국 인도와 중국에도 페트, 담배필터용 섬유공장을
세울 계획이다.

이중 페트는 이스트만케미컬의 최대 효자상품이다.

매년 20%씩 성장하고 있는 세계 페트시장에서 이스트만 케미컬은 거의
30%의 시장점유율을 갖고 있다.

디벤포트는 이런 여세를 몰아 앞으로 98년까지 10억달러를 투자, 전세계
페트생산능력을 연간 34억파운드로 늘릴 방침이다.

이는 연간 300억개의 플라스틱병을 만들만한 양이다.

이스트만 케미컬이 "세계 톱 클래스의 화학업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지작업은 끝났다.

디벤포트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집을 떠나 독립했으니 이제는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차례다"

< 노혜령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