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무부가 주한스위스대사에게 노태우전대통령 일가족 20명의 명단을
넘겨 줌으로써 노씨의 스위스은행 비밀계좌 여부에 대한 추적이 본격화
됐다.

정부는 스위스 정부가 이를 토대로 비밀계좌 존재여부를 확인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계의 전문가들은 명단만 가지고는 스위스 측이 계좌 존재
여부를 쉽게 확인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스위스는 우리정부의 협조요청이 전달된 이상 ''형사사건의 국제사법공조에
관한 연방법''에 따라 일단 연방 법무경찰부를 통해 예금조회가 가능한 경우
인지를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예금조회 요건이 충족되면 해당은행에 이를 확인하도록 명령하는 동시에
예금인출을 동결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그러나 우리쪽이 원하는 답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계좌확인을 해주려면 비밀계좌가존재하고 누가 누구에게 주었는지에
관한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 되도록 스위스연방법에 규정하고 있기 때문
이다.

다시말해 예금주가 누구인지와 예금구좌번호및 비밀번호를 반드시 서면으로
밝혀야 한다.

그러나 현재 검찰은 계좌번호나 소유자의 명의는 확인하지못하고 있기
때문에 관련자로 추측할 수 있는 일가족의 명단을 보내 확인해보겠다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대로라면 계좌확인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부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스위스당국은 비밀계좌에 예치된 자금이 범죄와 연루된 자금이라는 사실
증명 또한 요구하고 있다.

물론 해당자금이 범죄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이 됐다.

검찰이 노씨를 뇌물수수죄로 구속수감했고 스위스연방법에서도 뇌물수수는
범죄로규정돼 있기 때문에 범죄와 관련된 자금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뇌물인 경우엔 누가 누구로부터 뇌물을 받아 스위스의 어느 은행에
입금했다는 사실을 명기해야만 사법공조가 가능하다는 견해도 있어 역시
간단하게 해결되기 어려우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같이 까다로운 요건 때문에 스위스에는 연간 2천5백여건의 계좌확인과
예금반환 요청이 들어오지만 스위스정부가 확인해준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란은 호메니이정권이 들어선 이후 팔레비 전국왕의 비자금을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필리핀도 마르코스 전대통령의 은닉예금 55억달러를 확인해주도록
요청했으나 겨우 5억달러만 확인됐다.

그것도 10년이 걸렸다.

5억달러도 마르코스 본인명의로 개설된 예금이었기에 가능했는데 지난
8월에 확인을 하고도 돈의 귀속문제를 놓고 필리핀 내부에서 분쟁이
빚어지고 있다는 이유로 반환을 않고 있다.

스위스 정부가 비밀예금 게좌를 확인하고 돈을 돌려주는데 그만큼
까다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노씨가 스스로 스위스은행의 비밀계좌 존재여부를 자백하지 않는한
돈을 반환받는 것은 물론 계좌의 존재사실을 확인하는 데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안상욱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