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축재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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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세조때는 단종을 몰아내는데 앞장섰던 인물들이 공신의 반열에
올라 권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장수하면서 축재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권세와 부가
일세에 떨쳤다.
그중에서도 5명의 왕을 섬기면서 30여년동안 왕실의 터줏대감으로 군림
했던 한명회와 정인직는 요즘 세상에 알려진것과는 달리 "축재의명수"로
백성들의 원성을 크게 샀던 인물이다.
특히 그들의 사후에 내려진 사관들의 평가는 무서우리만큼 냉혹했다.
한명회는 세종의 능인 영릉을 만들때 그곳에서 50리나 떨어져있는 천녕현
에서 "닭소리와 개소리가 들린다"고 세조에게 거짓으로 고하고 그 고을
주민을 이주시킨뒤 자기 소유의 농장으로 삼았다.
그가 죽은지 25년이 되는 중종7년(1512)까지 천연현이 복구되지 않고
주민들의 청원이 잇따르고 있는것을 보다못한 사관들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심하도다.
권신이 후세에까지 해를 끼치고 백성에게 원성을 쌓게 함이여.
임금을 속여 마음대로 옛고을을 혁파하고 스스로 차지하여 농장을
삼았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한편 학자풍의 인물인 정인지의 축재법은 한명회와는 좀 다른 구석이
있었다.
생활이 매우 검박했다는 그는 재산불리기를 취미처럼 여겼다.
만석꾼이었으면서도 틈만있으면 이웃의 집과 땅을 사들였고 봄에 곡식을
꾸어주었다가 가을에 이자를 붙여받는 장리에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만큼
능했다.
장사속도 밝았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성균관에서 원로학자를 뽑아 임금이 그들에게 배례
하는 의식(배로고례)의 후보로 올랐다가 "장리를 한다"는 이유로 유림의
반대에 부딛쳐 탈락되는 일생일대의 수모를 겪게되자 그 충격으로 죽었다.
그가 83세까지 장수하고 죽자 사관은 이렇게 적어놓았다.
"사람들이 재산늘리기를 좋아하는 정인지를 그르다 했다.
그의 아들 숭조는 아비이 그늘을 바탕으로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으며
그 재물을 늘림도 그의 아비보다 더 했다"
임금의 비호아래 도깨비라도 사귄듯 하루하루 재산을 불려갔던 이들은
권력과 지위를 앞세워 축재한 죄를 이처럼 사후에 톡톡히 심판 받았다.
온 국민을 분누케 하고있는 전직대통령의 축재비리가 도마위에 올라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야 말로 법을 문학이론처럼 해석해서는 안된다.
사와 정은 양립할수 없고 시와 비는 자리를 바꿀수 없다는 진리가 이땅에
실현될때도 됐다는 생각이다.
역사의 심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서운 법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일자).
올라 권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장수하면서 축재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권세와 부가
일세에 떨쳤다.
그중에서도 5명의 왕을 섬기면서 30여년동안 왕실의 터줏대감으로 군림
했던 한명회와 정인직는 요즘 세상에 알려진것과는 달리 "축재의명수"로
백성들의 원성을 크게 샀던 인물이다.
특히 그들의 사후에 내려진 사관들의 평가는 무서우리만큼 냉혹했다.
한명회는 세종의 능인 영릉을 만들때 그곳에서 50리나 떨어져있는 천녕현
에서 "닭소리와 개소리가 들린다"고 세조에게 거짓으로 고하고 그 고을
주민을 이주시킨뒤 자기 소유의 농장으로 삼았다.
그가 죽은지 25년이 되는 중종7년(1512)까지 천연현이 복구되지 않고
주민들의 청원이 잇따르고 있는것을 보다못한 사관들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심하도다.
권신이 후세에까지 해를 끼치고 백성에게 원성을 쌓게 함이여.
임금을 속여 마음대로 옛고을을 혁파하고 스스로 차지하여 농장을
삼았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한편 학자풍의 인물인 정인지의 축재법은 한명회와는 좀 다른 구석이
있었다.
생활이 매우 검박했다는 그는 재산불리기를 취미처럼 여겼다.
만석꾼이었으면서도 틈만있으면 이웃의 집과 땅을 사들였고 봄에 곡식을
꾸어주었다가 가을에 이자를 붙여받는 장리에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만큼
능했다.
장사속도 밝았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성균관에서 원로학자를 뽑아 임금이 그들에게 배례
하는 의식(배로고례)의 후보로 올랐다가 "장리를 한다"는 이유로 유림의
반대에 부딛쳐 탈락되는 일생일대의 수모를 겪게되자 그 충격으로 죽었다.
그가 83세까지 장수하고 죽자 사관은 이렇게 적어놓았다.
"사람들이 재산늘리기를 좋아하는 정인지를 그르다 했다.
그의 아들 숭조는 아비이 그늘을 바탕으로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으며
그 재물을 늘림도 그의 아비보다 더 했다"
임금의 비호아래 도깨비라도 사귄듯 하루하루 재산을 불려갔던 이들은
권력과 지위를 앞세워 축재한 죄를 이처럼 사후에 톡톡히 심판 받았다.
온 국민을 분누케 하고있는 전직대통령의 축재비리가 도마위에 올라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야 말로 법을 문학이론처럼 해석해서는 안된다.
사와 정은 양립할수 없고 시와 비는 자리를 바꿀수 없다는 진리가 이땅에
실현될때도 됐다는 생각이다.
역사의 심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서운 법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