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은 마치 천연인것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어디 한번 보십시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천연의 구석은 보이지 않습니다.

멀리로는 이웃 마을이 없고 가까이로는 성곽이 보이지 않습니다.

산을 등지긴 했지만 산맥을 이루는 산줄기가 없고 물가에 임해 있으나
물이 솟아나는 수원이 없습니다.

높은 데를 바라보아도 나무와 숲에 가려진 절간의 탑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고, 낮은 곳을 굽어보아도 거리로 통하는 다리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주변 상황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고 외따로 떨어져 있는
모양이 영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본 경치들은 비록 인공적으로 대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들이기는
했어도 주변 경관들과 어울려 그야말로 천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지세가 맞지 않는 곳에 억지로 터를 잡아 농가를
지어놓은 것이므로 아무리 그럴 듯하게 농촌 마을처럼 꾸며놓았다고
하더라도 천연과는 거리가 먼..."

"이놈아!"

가정이 보옥의 말을 끊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보옥이 놀라서 입을 다물고 가정을 쳐다보니 가정이 손을 휘저으며,
"썩 물러가지 못할까!"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보옥이 이 지겨운 자리에서 언제 벗어나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라
속으로 오히려 잘됐다 생각하며 등을 돌려 일행에서 빠져나가려 하였다.

그런 보옥의 속마음을 알았는지 가정이, "돌아와!" 하며 신경질을
부렸다.

보옥이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와 일행에 섞였다.

가정은 어떻게 하면 보옥에게 더욱 골탕을 먹일 수 있을까 궁리를 하는
듯했다.

문객들은 부아가 나 있는 가정의 안색을 흘끗흘끗 살피며 보옥이 어떤
벌을 받을까 염려하는 얼굴들이었다.

지금 기세로 봐서는 가정이 보옥에게 체벌이라도 내릴성 싶었다.

그러나 가정은 보옥에게 대련을 짓도록 하는 것으로 그쳤다.

하지만 마음에도 들지 않는 경치를 두고 대련을 지으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체벌보다 더 심한 것인지도 몰랐다.

보옥이 가정의 명령을 받고 농가 마을을 둘러보았지만 시상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본 다른 경치들을 두고는 보옥이 대련을 금방 지어내었지만,
이번 경우는 아예 마음에서 내키지가 않는 것이었다.

보옥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그저 한숨 뿐이었다.

이 일을 어쩐다.

억지로라도 시를 지어야 하는데 점점 난감하기만 했다.

이태백도 이렇게 강요된 상황에서는 시를 짓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