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화 < 글로리아오페라단 단장 >

지난 1995년 9월15일 일본 동경 히도미홀 무대에는 오페라 "춘향전"
제4막2장이 펼쳐지고 옥중의 춘향이는 칼을 쓴채 앉아있다.

내일 죽을 운명의 그녀가 꿈속에 만난 이도령을 그리는 아리아는
관객의 가슴을 적신다.

무대앞 로얄석에 앉은 일본 중년신사는 안경속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내고 좌우에 앉은 기모노차림의 일본중년여인은 흐느끼기까지
한다.

우리의 가녀린 꽃 춘향이는 님향한 애절한 아리아를 열창하고 4막이
끝난후 무대입구에서 만난 우리의 악역 변사또와 월매는 눈이 벌겋게
충혈돼 감격의 눈물을 참고 있음이 역력했다.

일본땅에서 우리말로 우리 오페라를 한다는 것. 이는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노력끝에 도쿄의 대형무대에 선 출연자들은 뜨거운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이는 광복50주년 기념으로 우리 글로리아오페라단이 140명의 대식구를
이끌고 오랜 준비끝에 아시아최초로 우리 순수창작오페라 "춘향"
(현제명작)수출공연을 나선 결과였다.

"한국에도 오페라가 있습니까"

"한국에도 창작오페라가 있습니까"

단지 떠오르는 경쟁상대로서의 한국만을 알고있던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 오페라, 특히 창작오페라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총 2,200석이 가득 찼고, 그중 75%인 1,600여석은 일본인 관객이었던
것은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이 해외에서도 만만찮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국경을 초월하는 예술의 힘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공연후 그들은 원작의 문학적 매력과 뛰어난 가창력, 그리고 탄탄한
음악구성에 솔직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두운밤, 내리는 빗속에 공연장을 떠나는 차속에서 이 공연을 위해
6개월간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이렇게 많은 관람객이 축하해준데
대해 뜨거운 눈물이 두뺨을 적셨다.

"춘향아 고맙다. 그리고 수고많았다"

우리는 출연자 관람객 제작자가 모두 우는 감격의 3중주 아리아를
연출하면서 우리 오페라 "춘향전" 일본공연의 대성공을 마침내 이뤘다.

돌아오는길,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 오페라의 역사를 생각하게됐다.

1948년 일제치하를 벗어난지 불과3년만에 서구 오페라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공연됐다.

작품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그뒤 우리 창작오페라 공연은
50년 현제명선생의 "춘향"이 시초이다.

지금까지 작곡된 창작오페라는 총20여곡.

공연횟수를 따지면 외국작품이 300여회 공연된데 반해, 우리 창작물
공연은 단 50여회에 불과하다.

이렇게 공연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한데, 가장 크게 지적되는
것이 재미있는 작품이 적다는 것.

우리언어가 음악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주장도 많다.

가장 치명적인 비판은 "기본적으로 남의 음악인 오페라에 우리의 언어를
갖다붙인다는 것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노릇"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실제 외국 유명오페라의 국내공연장에서 만나는 관객들을 잡고
물어보라.

누구든 유명한 출연가수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그 내용의
이해도에 대해서는 속시원히 대답하지 못한다.

자막을 보다보면 연기를 놓치고 노래에만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내용은
뒷전이다.

예술이란 어느 하나의 고정틀에 가둘수 없는 것이다.

서양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불과 100여년밖에 되지않지만 그것의
뿌리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얘기는 거의 들을수 없다.

우리나라는 연주자 성악가등 수많은 뛰어난 음악가를 배출한 나라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낼 바탕은 충분히 갖춰져 있다.

앞으로 보다 많은 대중의 이해만 더해진다면 우리나라가 이탈리아
못지않은 음악선진국이될 가능성은 차고넘친다고 본다.

쓸데없는 편견은 버릴때가 되지 않았을까.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2일자).